나는 어린 시절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는 근본주의 교회에서 자랐다. 교회는 구약의 음식법에 근거해 돼지고기를 금했다. 안식법에 의해 주일 매매행위나 오락활동은 물론 심지어 학교 시험공부도 금했다. 당시는 그것이 좋은 믿음인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문자주의에 갖힌 믿음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지난 주 한국의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의 신앙적 배경이 도마 위에 올랐었다. 논란의 초점은 지구의 나이에 대한 견해 차이였다. 창세기의 창조기사를 문자적으로 믿는 신자는 지구의 나이를 약 6,000년으로 이해한다.
아담부터 시작해 인류역사를 계산하면 그렇기 때문이다. (젊은 지구론) 하지만 현대 과학계에서는 지구의 나이를 약 45억년으로 이해한다.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측정법으로 계산하면 그렇기 때문이다. (늙은 지구론) 어느 것이 맞을까? 16세기에 코페루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기까지 인류는 천동설을 당연한 진리로 믿었었다. 그리고 성경은 천동설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천동설을 지지하는 듯한 내용이 성경 곳곳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시 19:5-6) 가 한 예다. 문자적 표현만 보면 태양이 움직이기에 천동설을 지지하는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금도 태양계 내에서 천동설을 지지하는 사람은 없다. 과학의 발전 때문이다. 물론 성경은 대부분 문자를 그대로 믿어야 하는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승천과 같은 사건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문자적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모든 내용을 문자적으로 믿으면 성경 저자의 의도를 오해해 기형적 믿음을 낳을 수 있다. 성경에는 수 많은 종류의 문학적 기교들이 등장한다. 운율, 비유, 은유, 과장과 같은 것들이다. 그런 문학적 표현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어찌 될까? “네 눈이 범죄하면 빼 버리고...”(막 9:47) 라는 표현은 인간 죄성이 참으로 심각한 상태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만일 강조법을 문자적으로 믿으면 우리 가운데 맹인 아닌 사람 있을까?
창세기는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정체를 알리기 위해 기록한 책이다. 당시 애굽, 가나안, 바벨론은 피조물을 신으로 섬겼다. 창조기사의 목적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런 이방신들과 차별된 창조주 이심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목적을 드러내기 위해 창조기사는 문학적 기법을 사용했다. 따라서 창조기사에 등장하는 날 수를 포함한 모든 내용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게 되면 진짜 지구의 나이를 오판할 소지가 높다.
신학은 신학적으로 해석해야지 과학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벽에 부딪힌다. 창조기사의 문자에 근거해 지구 나이를 6천년으로 단정하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과학을 꿰어 맞추려는 것이 옳을까? 얼핏 보면 좋은 믿음처럼 보일지 몰라도 편협해 보인다. 기독교는 반지성주의가 아니다. 객관적으로 드러난 과학적 결과를 신앙의 이름으로 잘못이라고 판단하게 되면 스스로를 박스에 가두는 격이다. 마치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할 때 교회가 그를 이단아라며 종교재판에 회부한 것과 유사하다.
성경은 장르, 문법, 구속역사와 같은 수 많은 해석체계를 통한 통전적 분석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때는 과연 그 내용이 또 다른 해석적 가능성이 없는가를 늘 염두해 둘 필요가 있다. 창조기사를 문학적 틀을 적용해 해석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그리스도의 구속은총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나는 현재 삼겹살을 즐긴다. 주일에는 영화감상, 탁구, 심지어 카페도 간다. 구약의 문자주의적 신앙 기준에서 보면 믿음 없는 사이비 목사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지금이 과거보다 주 안에서 자유롭다.
율법이 문제가 아니라 율법을 이해하는 해석적 틀이 문제가 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구의 나이는 몇살일까? 열린 마음으로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면서 연구해 간다면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듯이 언젠가 모두가 수용할만한 명료한 답을 얻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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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철 목사/천성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