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단짠’ 열풍의 원조, 한국의 ‘소울푸드’로

2017-09-20 (수) 이해림 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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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예능 ‘윤식당’으로 재조명

▶ 1960년대 지금 형태가 등장
가족외식 단골메뉴 자리잡아


‘윤식당’은 갔지만 불고기가 남았다. tvN 예능프로그램 ‘윤식당’의 불고기가 사로잡은 것은, 발리 옆 롬복 섬에서도 북서쪽 작은 섬, ‘길리 트랑왕안’의 외국인들뿐만 아니다.

배우 윤여정씨가 가느다란 손길로 팬을 잡고 볶아낸 불고기는 ‘라이스’가 되고 ‘누들’이 되고 필리치즈샌드위치 스타일의 ‘버거’가 돼 가가호호 시청자들의 마음을 빼앗았다.

쉽고 간편한 윤식당 불고기 맛의 비결


화제의 ‘윤식당’ 불고기 뒤에는 홍석천, 이원일 셰프가 있다. 메뉴 개발은 물론 주방 운영의 기초까지 전수해준 ‘윤식당’ 컨설턴트다. 이 셰프는 “가게에서의 요리는 가정에서 하는 것과 완전히 달라야 하는데 출연자는 물론 제작진도 잘 알지 못 하는 부분이었다”며 두 가지 포인트를 짚었다. “가게에서는 들어오는 주문을 빨리 ‘쳐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밑 준비를 모두 마쳐놓고 바로 조리할 수 있어야 한다. 금방 조리할 수 있는 동시에 맛은 풍부하게 나야 하므로 양파를 채쳐 넣으면서 소스에도 갈아 넣어 감칠맛과 단맛을 내도록 했다. 또 하나는 마더 소스(모체 소스)로 여러가지 요리가 나와야 한다. 불고기 하나로 라이스, 누들, 버거 세 가지 메뉴를 할 수 있다.” 부드러운 단맛을 주기 위해 배도 함께 갈아 넣었다. “배는 오래 전부터 궁중음식이나 반가음식에서 고기를 연하게 하기 위해 사용돼온 재료”라는 것이 이 셰프의 팁이다.

초보 오너 셰프 윤여정씨를 위한 레시피인 만큼 ‘윤식당’ 불고기 요리는 누구라도 따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쉽다. 맛의 기본이 되는 마더 소스도 간단하다. 물 2컵, 간장 2컵, 양파 1개, 사과나 배 3분의2개, 다진 마늘 4분의1컵, 설탕 1컵, 후추 1티스푼을 믹서로 곱게 갈면 끝이다. 달군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배우 정유미씨처럼 야무지게 채 썬 당근과 양파를 먼저 볶는다. 대파와 불고기용 얇은 소고기도 넣어 볶다가 고기가 거의 익으면 만들어둔 마더 소스를 한 국자 넣고 1분간 더 볶는다. 불고기를 밥 위에 얹고 양상추와 고수를 곁들이면 감쪽같이 완성. ‘누들’을 만들 때는 마더 소스와 함께 불려둔 당면을 한 줌 넣는다. ‘버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당면 대신 미리 갈아둔 치즈를 넣고 치즈가 녹으면 빵, 양상추, 불고기, 고수 순으로 쌓으면 된다. 마무리로 트러플 오일을 살짝 둘러 복잡다단한 향으로 완성한다.

한국인의 입맛, 달콤짭짤한 불고기

시험을 잘 보면 제육볶음 대신에 불고기를 얻어먹을 수 있었다. 얇아서 녹아버릴 것 같은 소고기에 달고 짭짜름한 양념, 부드럽게 익은 야채. 당면도 빠지면 서운했다. 누가 그 맛을 거부할 수 있을까. 불고기는 한국인의 ‘소울 푸드’ 중 하나다. 사그라지지 않는 ‘단짠’ 열풍의 맥을 짚어 올라가면 한국인의 미각 유전자 지도에 새겨진 달콤하고 짭짤한 불고기가 필시 나타난다.

단, 원류를 짚어 보자면 현재 형태의 불고기는 불과 반세기 전에 등장한 젊은 음식이다. ‘우래옥’ ‘하동관’ ‘한일관’ 개업 당시부터 고기를 대는 ‘팔판정육점’에서 나온 이야기다. 청와대 옆 동네 팔판동에 자리한 이 작은 정육점은 1940년 개업했다. 동대문종합시장 안에만 3곳의 매장을 두고 총 7곳 매장을 경영하던 선대의 ‘용흥정육점’이 그 전신이다. 한강 이북의 군납도 이 정육점이 모두 도맡고 있었으니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한우 암소 1++ 등급만 고집하는 이 정육점에서 ‘육절기’를 들인 것이 1960년대 후반의 일이다. 소 옆구리만 만져봐도 육질을 아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의 ‘정육 명장’ 이경수씨가 증언한다. “한국전쟁 전에도 불고기가 있기는 했다. 얇게 썬 고기에 양념을 발라 석쇠에 굽는 형태였다. 휴전 후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뼈를 푹 고은 탕으로나 소고기를 먹을 수 있었고, 1960년대 중반부터 지금 형태의 불고기가 등장해 외식 메뉴로 자리 잡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1967년 대학 재학 당시에 불고기로 외식한 기억이 있는데 현재와 같았다.”

서울의 불고기 명가, 우래옥과 보건옥

1946년 11월 서울 주교동에 ‘우래옥’이 문을 열었다. 처음부터 불고기와 평양냉면이 대표 메뉴였다. 이경수씨는 “첫날 5근을 받아갔는데 둘째 날 20근, 셋째 날은 70근으로 주문이 늘었다”며 서울의 음식 역사를 써내려 온 명가의 개업 문전성시를 기억했다. 우래옥 개업 때부터 근속해온 전무 김지억씨는 “창업자 할아버지가 평양에서 모셔온 주방장 두 분이 만들었으니 우래옥 불고기는 진정한 이북식 불고기”라며 “창업 당시부터 불고기 맛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불고기판에 굽는 우래옥 불고기에 들어가는 재료는 몇 가지 되지 않는다. 진간장에 참기름, 마늘과 소량의 설탕이 전부다. 채소도 극히 적다. 대파와 새송이버섯을 조금 썰어 곁들일 뿐이다. 불고기판 아래에는 냉면 육수를 부어 고기가 타지 않게 증기를 올리고 맛을 모은다. 진정 ‘소고기를 위한 불고기’라 할 만하다. 그런 만큼 고기도 부드러운 부위만 골라 불고기 재료로 쓴다. 양지를 제외하고 우둔, 등심, 설도를 덩어리째 받아 보드랍고 연한 살코기만 모은다. 조금이라도 질긴 부위는 따로 모아 냉면 등 육수를 내는 데 이용한다. 소량씩 무쳐 놓는 양념 맛도 가볍게 배어 구워 두면 모양새며 맛이며 단아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1980년 무렵 개업해 이제 40년을 바라보는 젊은 노포 ‘보건옥’은 서울식 불고기의 명소다. 개업연도도 가물가물할 정도로 털털하게 가게를 이어오고 있는 김계수·고옥자씨 부부가 영등포에서 정육점을 하다 차린 이 식당의 첫 상호는 ‘보건 불고기 센터’였다. 지금이야 넓은 주방을 활용하기 위해 김치찌개며 삼겹살까지 다양하게 다루지만 원래는 오로지 불고기에 매진하는 전문점이었다. ‘우래옥’ 골목 끄트머리 15평 남짓한 상가 자리에서 문을 열었다가 장사가 잘돼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우래옥’과는 골목 하나 차이다. 인근 유명한 불고기 전문점 주방에서 일하던 요리사를 데려와 내외가 집에서 하던 대로 불고기를 차려 냈다. 그야말로 현대, 서울식이다.

왜간장에 참기름, 마늘에 설탕이 조금 들어가는 데까지는 평양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에 채 썬 파와 양파, 당근이 들어가고 팽이버섯도 곁들여진다. 개업 때부터 다른 불고기 집들과의 차별점은 육수로 설렁탕 국물을 부어주는 것이다. 또 당면도, 메밀면도 아닌 소면을 말아준다는 점도 독특하다. 삶은 소면을 불고기 간이 밴 육수에 담가 먹으면 밍밍한 듯한데 그때는 이 식당의 간판 반찬인 쪽파 김치를 크게 한 입 물면 딱 간이 맞는다. 불고기판은 얕은 전골냄비를 쓴다. 육수를 자작하게 붓기도 편하고 밥 볶기도 편해서다. 다만 아는 사람끼리는 ‘원래 불판’을 청해 쓴다. 예전부터 쓰던 슬쩍 솟아 있는 형태의 불고기판이다.

불고기가 서울의 전유물은 아니다. 경남 언양, 전남 광양의 불고기는 조선시대 고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설야멱적’이나 고구려 당시부터 내려왔다는 ‘맥적’의 계통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고기에 양념을 해 수분 없이 구운 것이다. 언양식은 고기를 얇게 채쳐 쓰고 광양식은 고기를 얇게 저며 쓴다. 남쪽의 불고기는 마포구 ‘역전회관’과 송파구 ‘광양불고기’에서 맛볼 수 있다.

<이해림 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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