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영역 갈수록 넓어지는 ‘배지 문화’

2017-07-26 (수) 김주영·박서강·박미소 인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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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부터 삼계탕까지 카테고리 불문

▶ 사회에 경종 울리고 취향 저격하며 확산

영역 갈수록 넓어지는 ‘배지 문화’


“회사를 그만 두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꿈을 꾸지만 어쩔 수 없이 참고 다녀야 하는 현실이라 배지(Badge)로 나마 위안을 삼고 있어요.” 직장인 임언희(36)씨는 얼마 전‘퇴사’배지를 구입했다‘. 퇴사!!’라는 글자가 폭발하는듯한 디자인이 자신의 바람을 그대로 담은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드라마작가를 꿈꾸는 임씨는 기숙사에 모셔 둔 배지를 바라보며 당당하게 회사를 떠나는 상상을 한다“. 틈틈이 방송국 공모전에 도전하고 있지만 쉽지 않네요. 언젠가 퇴사를 한다면 제꿈이 이루어진 것 이겠죠.” 단체 또는 직장 등 소속을 표시하거나 기념의 수단이던 배지가 달라지고 있다. 사적인 취향부터 현실에 대한 저항과 일탈, 사회적 메시지 전달까지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배지의 세계를 들여다 봤다.

#1 암울한 현실의 역설적 위로

적성은 무시한 채 성적과 학교 이름만 따져 진학한 대학생활에서 회의를 느낀 손모(21)씨는 가방에‘ 자퇴’배지를달았다“. 자퇴하고 싶다”는 말을 습관처럼 되뇌면서도 막상 미래에 대한 불안감때문에 용기를 못 내는 손씨에게‘ 자퇴’배지는 상상일탈이자 역설적 위로다.


‘자퇴’ ‘퇴사’ ‘휴학’ ‘퇴근’ 배지를 만든 김모(24)씨는 “현실적 제약때문에 실행에 옮기기 어려운 것들을 배지로 표현했다”고 말했다.

절망적인 단어로 위안을 주는 배지는 또 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막막했던 박해영(26)씨는 ‘좌절하지 말자’는 의미로 ‘멸망’배지를 만들었다. 그는 “불안한 상황에 놓인젊은이들이 ‘멸망’배지를 보며 즐겁게 속풀이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배지를 구매한 박형원(33)씨는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자조적 응원 같다‘. 모두 멸망했으면 좋겠다’고저주할 만큼 세상이 더 나빠지면 안되니까”라고 말했다.

#2 배지, 사회에 경종을 울리다

금혜지(25)씨는 친구들 사이에서 ‘걸어 다니는 경종’ 또는 ‘프로경종러’로 불린다. 세월호 리본이 달린 천가방에 성차별 반대, 유기견 문제, 환경보호 등 사회적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다양한배지를달고다니기때문이다. 금씨는“내정체성과신념, 연대의식을 반짝이고 예쁜 것들로 기록하고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배지는 세월호참사이후 꾸준히 등장하고있다. 한일 위안부합의를 반대하는 배지를 비롯해 세계 최초로 여성이 투표권을 취득한 해를 강조한 ‘1893 페미니즘’배지, 미세먼지 문제해결을 촉구하는 배지등이 SNS상에서 공동 구매형태로 유통되고 있다.

#3 취향저격

거창한 메시지 대신 빵이나 초밥, 삼계탕 등 음식 배지도 인기다‘. 낙엽 소시지빵’배지를 가방에 단 이보슬(31)씨는“ 좋아하는 음식을 귀엽게 표현한 배지를 보면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가격이 저렴해서 ‘시발비용(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면 쓰지 않았을 돈)’으로도 아깝지 않다”고말했다. 초복인 지난 12일엔 ‘삼계탕’배지도 등장했다. 제작자 연은정(25)씨는“ 복날에 지인들에게 선물하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삼계탕 사준다고 불러내 배지를 주는 상황은 상상만 해도 즐겁지않나”고 말했다.

개인의 취향을 배지로 표현하는 방식은 영화 배지에서도 나타난다. 포스터와 달리 배지는 디자인과 주물, 채색 등의 단계를 거치면서 새로운 매체로 탄생한다. 영화에 담긴 메시지를 새로운 방식으로 함축할 수 있다는 점도 영화 배지가 지닌 매력이다.

구정우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세월호나 위안부배지가 사회적이슈에 대한 젊은층의 관심과 입장을 표현하는 매개로서 각광받았다면 최근엔 사적이고 하찮아 보이는 일상적 소재를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전하고 공감을 이끌어 내는 배지가 주목을 받고있다”고 말했다.

<김주영·박서강·박미소 인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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