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패셔너블하지 않은 패션 it 시크 매력

2017-06-0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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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리콘 밸리서 유행하기 시작

▶ 격식과 획일화 거부한 개성

실리콘밸리는 IT 천재들의 집합소이다. 이런 실리콘 밸리의 수식어 하나가 더 생겼다. 바로 ‘IT 시크’다. 요즘 한인을 비롯한 젊은층 사이에서도 이런 IT 시크가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스트라이프 남방이나 면 티셔츠에 회사 후디를 입고, 아디다스 삼선 슬리퍼 대신 크록스를 신는다. ‘폴로 셔츠’라고 부르는 칼라 달린 면티 ‘피케 셔츠’에 ‘베이지색 면 바지’도 인기다. IT업계가 세계에 끼친 영향은 비단 인터넷과 인공지능만이 아닌 것이다. IT시크를 속속들이 파헤쳐 보자.

▶IT 시크


프렌치 시크를 실리콘밸리가 재해석한 걸까. 감지 않은 머리, 밀지 않은 수염, 갈아입지 않는(것처럼 보이는) 면 티셔츠와 바지, 무심하게 걸친 후디…. ‘패션의 교황’ 칼 라거펠트가 마주쳤다면 준엄하게 꾸짖었어야 마땅한, ‘패션’이라 부를 수 없는 이 패션은 그러나 이제 엄연한 패션코드로 자리 잡았다.

‘테크 유니폼’이라는 비아냥을 받을 정도로 획일적인 패션코드로 시작했지만, 럭셔리 디자이너 브랜드의 런웨이에서도 뿔테 안경에 회색 면 드레스, 굽 낮은 로퍼를 신은 ‘기키 시크 룩(geeky chic look)’의 모델을 종종 마주칠 수 있다. 괴짜를 뜻하는 ‘긱(geek)’과 ‘공부 잘하는 얼간이’를 일컫던 ‘너드(nerd)’는 실리콘밸리의 IT 벤처기업가들 덕분에 제2의 긍정적 의미항을 사전에 추가 등재했다.

‘컴퓨터밖에 모르는 괴짜 천재.’ 그 앞에 ‘패션 따위는 관심도 없는’이라는 의미가 괄호 안에 묶여 있지만, 이제는 패션에 대한 그 태도마저 하나의 패션이 돼 ‘너디 시크’, ‘기키 시크’ 등으로 불리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패셔너블하지 않은 패션 it 시크 매력

패셔너블하지 않은 실리콘밸리의 상징 it시크로 한껏 뽐낸 사람들

▶테크룩

‘테크룩’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차림새일까. 웹 테크놀로지 블로그인 ‘리드라이트(ReadWrite)’가 시각화한 ‘테크 유니폼’에 따르면, “머리는 ‘나 방금 일어났어요’ 스타일에, 수염은 턱수염 중심으로 숱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면 티셔츠에 바지는 진한 워싱 청바지를 입는다. 티셔츠 위에 걸치는 후디는 회사 로고가 박힌 걸로 입어 미묘하게 ‘나는 중요한 일 하는 사람’임을 알린다.

신발은 스니커즈를 신는데, 달리지는 않아서 흙 같은 건 안 묻어 있다.” 여성의 상투적 패션코드에서 ‘명품백’의 위상을 차지하는 건 손목에 찬 각종 웨어러블 기기. 애플워치부터 페블워치, 핏빗 만보계까지 각종 스마트워치가 필수다. 접이식 자전거 픽시, 다양한 IT기기들을 담고 다닐 메신저백, 테이크아웃 커피도 빼놓을 수 없다.

왜 이런 복장을 선호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실리콘밸리 룩의 스테레오타입화된 차림새에 숨은 젊음의 성공신화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젊은 스타트업 기업가는 ‘캐주얼 아카데믹 드레스’를 일터로 들여온다. 젊은 창업자에 대한 숭배의 문화 속에서 그래픽티셔츠와 카고팬츠를 입은 대표의 이미지는 기업 전반에 하나의 풍조로 퍼진다. 동업자와 투자자들이 이 드레스코드에 가세하고, 신입사원은 당연히 거부할 수 없다. 영화와 드라마의 시각적 재현도 시시때때로 이뤄진다. 회사가 대형강의실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다.” 실제 엔지니어로 일하는 김모씨는 “꾸미고 차려 입는 데 대한 거부감 같은 게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공연장이나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처럼 격식을 차린 복장이 어울리는 장소에서도 낡은 맨투맨 셔츠나 라운드티, 후디를 고집한다”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너무 꾸민 듯한 복장은 오히려 ‘나는 이날 이 순간을 고대해왔다’고 써 붙인 것 같지 않냐”고 반문한다.


▶패션의 완성은 성공?

패션계 큰 흐름인 꾸민 듯 안 꾸민 듯 평범한 ‘놈코어’ 코드의 강력한 위력은 모두가 공감하는 내용. 이런 놈코어도 ‘IT시크’와 접속된다.

테크업계의 옷차림이 멋있다고 생각하든, 멋없다고 생각하든, ‘IT시크’가 기술만능시대의 의미망 속에서 강력한 패션코드로 자리 잡은 것만은 확실하다. IT맨들이 면티와 후디를 입어야만 하는 필연적 이유 같은 건 없다.

스티브 잡스도 애플 초창기의 신제품 프리젠테이션에는 수트 차림으로 등장하곤 했으며 구글의 에릭 슈미트도 많은 자리에서 여전히 넥타이에 수트 차림을 즐겨 입는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모터스 대표도 면티 외에 근사한 수트 차림을 자주 선보인다. 실리콘밸리에서 시작해 세계로 뻗어나간 ‘테크룩’은 철저히 세대적·사회적·문화적 산물이란 뜻이다.

스티브 잡스가 거주했었고 마크 저커버그, 세르게이 브린, 에릭 슈미트 등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실리콘밸리 팔로알토 지역에는 명품의 대명사 에르메스 매장이 아직도 들어서지 않았다.

패션을 인간의 옷에 대한 태도라고 할 때 실리콘밸리의 부자들은 ‘패셔너블하다’라는 단어의 전통적 의미를 전복하고 있다.

돈이 없어서 갭 티셔츠를 입는 게 아니다. 에르메스 셔츠가 아닌 갭 면 티셔츠를 선택한 이유가 더 패셔너블하게 느껴진다. 이제 패션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재정의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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