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9인의 현자(賢者)’

2016-12-12 (월) 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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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린 시절 읽은 ‘걸리버 여행기’는 아동용이다. 원본은 당대 영국의 사회상을 풍자로써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아동용에는 사회비판이 사라지고 없다. 그저 소인국과 거인국을 여행한 신기한 이야기다. 풍자문학의 사회비판은 사라지고, 동화만 남아있는 셈이다.

저자 스위프트는 원본 ‘1부 소인국’에서 영국의 정치, 사회, 종교를 비판한다. 당시 보수당인 토리당과 자유당인 휘그당간의 투쟁 양상을 풍자했다. 릴리풋 사람들이 ‘높은 구두 뒤축파’와 ‘낮은 구두 뒤축파’가 나뉘어 싸우는 모습이다. ‘2부 거인국’에서는 인간사회의 사악함을 냉소하게 비판한다. 거인국 왕이 걸리버에게 들은 유럽사회의 양상인 음모, 탐욕, 위선 등을 비난한다. 그러면서 인간들이란 작고 간악한 벌레의 무리라고 경멸하는 대목이다. 3부 ‘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 여행에서는 지식인들을 풍자한다. 공상과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에 대한 욕망만 가득 찼다고. 4부 ‘말의 나라‘이야기에서는 ’야후(인간)‘을 등장시켜 인간의 문화란 순수한 동물들의 세계보다도 더 추악하다고 폭로한다.

‘걸리버 여행기’는 법률가에 대한 비판과 풍자로도 유명하다. 변호사를 ‘보수 때문에 어릴 때부터 하얀 것을 검다고, 검은 것을 하얗다고 증명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낱말로 증명하는 기술을 배우는 사람들’이라고 꼬집는다. 그리고 “변호사들이 사회에서 그들만이 사용하는 특별한 암호와 은어가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한다. 법률자체도 이러한 용어로 쓰여있다”고 풍자한다.


재판관들의 비판도 아끼지 않는다. “국가에 대한 반역죄로 기소된 사람들을 재판하는 방법은 매우 짧아서 칭찬할만하다. 재판관은 먼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살펴본다. 그런 다음에는 법률에 전혀 위반되지 않고 간단하게 교수형을 선고하거나 살려줄 수 있는 것”이라 비판한다. 변호사의 악덕, 법조사회의 배타성, 권력의 시녀가 된 법원의 실정을 풍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당시뿐 아니라 현재도 적용되는 인간사회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2016년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압도적 가결로 통과됐다. 1•234•56•7…2. 국회의원 300명 중 1명이 불참했다. 찬성 234, 반대 56, 무효 7‘ 그리고 기권이 2명이었다. 이제 대통령의 운명은 탄핵심판 절차를 진행하는 헌법재판소 판결에 달려 있다. 9명의 재판관 중 6명 이상이 어떤 결정을 내리냐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한국의 헌법재판소는 대부분 고위법관이나 검찰 고위직 인사로 채워졌다. 대법관이나 검찰총장 등에 오르지 못한 이들을 배려하는 자리 정도로 취급될 정도다. 재판관들 대부분이 보수색채가 강해서 국민의 뜻을 여론지형에 맞게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받아왔다. 심지어 법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개인의 정치신념과 이념의 따른 뿐이라며 ‘법복 입은 정치인’으로 폄하된다. 그동안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수긍보다 찬반이 엇갈리는 반응을 보였던 이유다.

미국 연방대법관 9명은 ‘9인의 현자(賢者)’로도 불린다. 이들이 있어 연방대법원이 가장 신뢰받는 국가기관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대법관들이 탁월한 법률지식과 논리에 더해 시대에 맞는 깊은 통찰과 철학으로 국민의 뜻을 반영하는 현명한 결정을 내린다는 믿음이 쌓여 왔기 때문이다. 연방대법원 판결이 항상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중받는 것은, 대법관들이 법률에 의거한 치열한 토론의 결과물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제, 대통령의 탄핵안이 헌법재판소로 넘어왔다. 재판관들은 역사적인 심의를 통해 공정하고 신속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법률과 양심에 따라 독립적인 의견에 대해 치열한 토론의 결과물이어야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 어떤 결정이 내려지더라도 수긍하고 존중하게 될 것이다.

여하튼, 이번 기회에 헌법재판소가 오명을 씻고 ‘9인의 현자’가 이끄는 최고사법기관으로써 제 자리를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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