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햇빛과 바람의 집’

2016-11-01 (화) 09:29:05 이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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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의 창문엔 봄이면 제일 먼저 해가 들고 겨울이면 제일 늦게 그늘이 들었다. 옛집에 살던 십년 동안 나는 행복했고 아파트 화단에심어놓은 모과나무가 천천히 자라나 내가 살던 4층 베란다에 닿을만큼 나도 천천히 늙어갔다. 그 넓은 창문 아래로 새하얀 목련 꽃잎이 시든 바나나 껍질처럼 떨어져 맨살로 뒹굴 때 나는 미련 없이 옛집을 떠났다. 세월의 책상 밑으로 깊어가는 눈부신 쇄락의 병을 아무도 몰래 앓기 시작하던 잠복기의 시절이었다.

구멍 뚫린 무처럼 숭숭한 문패를 지닌 늑골 같은 창문엔 여름이면제일 먼저 해가 들고 가을이면 제일 늦게 그늘이 든다. 앙상한 바람의 노래가 천정의 환풍기를 타고 새어드는 변두리 같은 이 집은 툭하면 키 낮은 풍향계의 지붕이 남쪽으로 머리를 풀며 운다. 이 집에사는 삼년 동안 나는 그늘진 책상 밑에 웅크린 다크써클의 병을 앓으며 아무도 몰래 늙어갔다. 불편은 사랑할 수 있지만 잔주름으로피어나는 추락의 세월은 막을 수 없었다. 오래된 영화처럼 구부정한계단 끝에는 도둑고양이처럼 살며시 다녀가곤 하는 502호 사람들의발자국이 아침이면 바람의 밀대로 벗겨낸 현관문 페인트칠 아래 투명한 그림자의 인사로 찍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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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집이 있다. 옛 집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집, 혹은 과거와 현재, 그 사이에 그리움과 열망과 아쉬움, 그리고 생명을 쇄락케 하는 세월이 있다.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이동한다. 때로는 희망에 차서, 때로는 그 무엇인가에서 벗어나기 위해, 때로는 운명처럼. 과거의 장소에는 꽃이 있었고 행복이 있었다. 그런 곳을 왜, 무엇을 위해 현재의 장소로 미련도 없이 떠나온 것일까. 유년과 장년, 시골과 도시, 꿈과 현실을 연상케도 하는 두 개의 집을 통해 펼쳐 보이는 소시민의 서정이 소소하고 쓸쓸하다.

임혜신<시인>

<이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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