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가주의 겨울은 따뜻하다. 여름은 덥지만 습기가 없어 그늘에만 들어가도 시원하고 밤에는 서늘하기까지 하다. 여름은 푹푹 찌고 겨울은 살을 에이는 바람이 부는 서울에 살다 온 사람들에게 남가주 날씨는 천국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런 좋은 날씨에도 단점은 있다. 사계절이 뚜렷하지 않다 보니 단풍 구경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뭇잎이 파란 것은 그 안에 들어 있는 파란 색깔의 엽록소 때문이다. 엽록소는 햇빛과 물, 탄소를 이용해 식물의 영양분인 당분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긴 여름이 가고 가을로 접어들면서 해의 길이가 짧아지면 더 이상 엽록소가 할 일이 없어진다. 시간이 지나면 파괴되는 엽록소 공급을 계속 해 봐야 나무 입장에서는 수지가 맞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엽록소가 사라지고 나면 원래 나뭇잎에 들어 있던 카로티노이드란 성분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은행나무와 미루나무, 애스펜 등이 노란 색을 띄는 것은 바로 이 성분이다.
엽록소의 퇴장과 함께 만들어지는 성분도 있다. 안토사이아닌이란 성분이다. 이 성분은 독성이 있어 이것이 든 낙엽이 떨어진 자리는 다른 식물이 자라지 못한다. 낙엽으로 져서도 한 때 자신의 일부였던 나무를 보호하는 임무를 다 하는 것이다. 이 성분은 낙엽으로 지기 전 나뭇잎을 빨갛게 물들이는 역할도 한다. 단풍나무의 고운 붉은 빛은 이 안토사이아닌 때문이다.
남가주에서도 LA식물원이나 빅베어 레이크, 애로우헤드 등에 가면 단풍을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제대로 된 단풍 구경을 하려면 4~5시간 운전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남가주에서 가장 가까운 단풍 명소를 꼽자면 동쪽 시에라의 비숍 일대를 우선 들지 않을 수 없다.
준 레이크 등 세 호수를 끼고 도는 준 레이크 루프(June Lake Loop)는 이곳을 대표하는 단풍 관광지의 하나다. 새파란 호수에 남색 하늘, 새하얀 구름, 샛노란 애스펜이 어우러진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싸르르 흔들리며 우수수 떨어지는 애스펜 낙엽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 역시 단풍은 아시안들이 더 좋아하는지 숲속 곳곳에서 한인과 중국인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여기까지 온 이상 인근 ‘악마의 돌무더기’(Devli’s Postpile) 국립 기념물도 들려보자. 꼬불꼬불 한 길이 좀 험하기는 하지만 10만년 전 뿜어져 나온 용암을 자연이 육각형으로 정확히 잘라낸 세계에서 가장 멋진 돌기둥을 구경할 수 있다.
거기서 멀지 않은 사우스 레이크, 사브리나 레이크도 준에 못지않은 명소지만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맥지 크릭은 숨겨진 보석 같은 곳이다. 얼핏 황량한 산지 같은데 비포장 도로를 덜컹이며 한참 들어가면 퀄퀄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함께 노란 애스펜이 넘실대는 숲이 나온다. 100년만의 가뭄이라는데 어디서 그렇게 많은 물이 쏟아지는지 모를 일이다. 산 사이로 지는 석양이 애스펜을 황금빛으로 불타게 만든다. 시냇가 바위에 걸터앉아 단풍과 낙엽이 춤추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속세의 홍진이 깨끗이 씻겨 지는 듯하다.
지나간 시간도, 사랑도, 돌아오지 않지만 단풍은 내년에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올해는 이번 주가 거의 마지막이다. 시에라의 가을이 어떤 모습인지 그 진수를 맛보고 싶다면 조금 서둘러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