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바랜 기억

2016-09-30 (금) 09: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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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희 / 한국학교장

내가 또렷하게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천진난만한 때의 사진을 꺼내어 들었다. 사진은 빛이 많이 바랬지만 그 옛날 마루에 앉아서 속옷만 입고 팔다리에 수박씨를 붙이고 아주 큰 수박 한 쪽을 열심히 먹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사진 속의 나는 수박 맛에 도취되어 보였다. 부모님 눈에 수박 맛에 빠져 있는 어린 내가 얼마나 이뻤으면 그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셨을까? 천천히 부모님의 마음을 대신하여 보았다. 그리고 정말로 잊혀지지 않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 일들이 떠올랐다.

이도 잠깐, 우습고 부끄러운 일들도 이어서 생각났다. 소꿉장난을 하면서 빨간 벽돌을 으깨어 고춧가루를 만들며 놀던 일, 항상 무엇인가를 들고 퇴근하시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앞집 친구와 함께 쪼그리고 앉아서 기다리던 일, 그 친구 아버지가 오시면 혼자 멀쑥하게 앉아 나도 아버지를 그리워했던 일 … 이런저런 바래버린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좋은 추억만이 아니라 기억조차 하기 싫은 사건들, 저 깊은 곳에 자물쇠로 꼭꼭 잠궈 버렸던 일들도 모락모락 함께 떠올랐다. 사진의 한 장면이라면 추억하기 좋게 확대하거나 그냥 찢어버릴 수도 있으련만...

나의 깊은 곳에 있는 일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배경, 색, 심지어는 주인공들도 밝고 예쁘게 복원하고 3D로 만들어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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