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옷장은 말해준다, 당신이 누구인지

2016-05-20 (금) 김홍기 패션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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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기 패션큐레이터의 “입는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스타일링 강의를 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당신의 옷장을 되돌아 보라’고 주문한다. 패션 스타일리스트들은 옷장 설계(Wardrobe Planning)라는 개념을 즐겨 쓴다.

인간의 옷매무새를 포함한 패션 스타일링은 개별 옷의 조합이 아닌, 옷장이라는 구체적인 하드웨어에서 출발한다. 결국 스타일링은 인간의 옷장을 설계하는 것이다.

‘옷을 보호하는 장소’라는 뜻을 가진 옷장이란 단어가 사전에 등재된 건 14세기다. 당시 자본주의와 교역의 확장으로 얻게 된 부를 통해 귀족과 경쟁하면서 부르주아들은 화려한 옷들을 옷장에 정리하면서 일지를쓰거나 옷에 대한 논평을 정리해 남겨두곤 했다. 16세기 초 독일의 명문 상업가문이었던 푸거가의 회계사 마테우스 슈바르츠가 그랬다.


그는 1520-60년 40년 동안 자신이 입었던 옷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위하여 화가를 시켜 100여장이 넘는초상화를 그리고, 각 초상화 속 패션에 대해 꼼꼼하게 설명을 남겼다. 세계 최초의 패션북(Trachtenbuch)은이렇게 태어난다.

그가 활동한 16세기 초는 스타일링이 삶의 필수기술이 된 때다. 왕과 귀족은 아래 계급과의 차별화를 위해 사치금지령을 내려서 각 계층별로 허용되는 라이프스타일의 문법을 전했다. 이런 치열한 경쟁 속에서, 윗선에 찍히지 않으면서 아래로는 존경을 끌어낼 옷차림의 방식을 찾고자 했던 슈바르츠는 옷을 넘어 옷장 개념으로 스타일링의 방식을 사유했다. 그는 옷을 통해 자신의 탄생, 유년 시절의 성장 과정에서 성년이 되기까지, 옷에 자신의 감정과 당대 일상문화에 대한 생각을 담아냈다.

오늘날로 치면 그는 세계 최초의 패션 블로거였다. 그는 40년 동안 자신이 옷을 통해 얻은 것과 잃은 것,옷장을 정리하며 느낀 소회를 정리했다. 특히 14세 때 학교 졸업과 함께 학생가방을 옷장에서 미련 없이 버렸던 일을 어찌나 자랑스러워하던지. 그에게 옷장정리는 항상 생애단계별 성장의 표시였다. 또한 옷이란 그에게자신의 내면을 일깨우고, 찬연한 일상의 새로움을 수용하는 매개였으며 진화하는 교양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사물이었다.

옷장을 보면 인간의 삶이 보인다고 할 정도로, 옷장은 한 인간의 구체적인 미감, 색채와 형태에 대한 이해,삶을 바라보는 관점들이 담겨있는 광맥이다. 철제 혹은 나무로 만든 행어(hanger)에 걸려 있는 옷은 침묵의 어휘들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리의 지식이 늘고, 사회관계와 소통방식이 복잡해짐에 따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변화가 생기듯, 옷장 속의 옷은 세월에 따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의사결정 내용은 딱 세 가지다. 옷장에 남길 것인가? 혹은 버리거나 기부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수선해서 입을 것인가를 분류하는 것이다. 이때가장 어려운 단계가‘ 버려야 할 것’을 고르는 단계다. 지난 2년간 입지 않았던 옷들은 버려야 한다. 또한 가격표도 떼지 않은 채, 이런 옷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지내다가 정리하면서 알게 된 옷, 특별행사나 기다리고 있는옷, 10년 전에 입었던 옷들, 세월이 지나면서 현재의 피부색조나 신체형과 맞지 않는 옷도 버려야 한다. 이후에는 남은 옷들을 밝은 색에서 어두운 계열로 분류한다. 이 과정을 통해 색으로 보완할 수 있는 품목끼리 쉽게조합해서 입을 수 있다.

재분류 과정에서 우리는 깨닫게 된다. 생각보다 우리가 가져야 할 이상의 옷들이 쌓여있다는 것. 툭하면유행은 돌고 돌기 마련이라며 묵혀둔 유효기간이 지난 옷을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는 이들이 많다.

옷에 담긴 추억을 이야기하며 과거의 옷이 가져다 주는 정신적 안정감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때문에 옷을 버릴 수 없다면 우리는 자신을 과거에 묶어두는 꼴이 된다.

잘 설계된 옷장을 만드는 비결은 ‘비움과 채움’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이고, 비움이 주는 긴장감을 삶을 움직이는 활력소로 전환시키는 일이다. 바로 지금 당신의 옷장과 작별하라.

<김홍기 패션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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