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모 수술후유증 적고 아기 면역력 높아져 좋아
▶ 돈벌이 중요한 대형병원 제왕절개 권유가 문제
# 얼마 전 서울 강남에 있는 분만전문병원에서 제왕절개수술로 첫 아이를 출산한 박모(43)씨는 마음이 편치 않다. 본인 맘대로 출산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흔에 결혼해 결혼 2년 만에 아이를 가진 박씨는 인터넷 검색으로 자연분만을 잘한다는 병원을 찾았다. 나이는 많지만 지병도 없고, 건강에 자신 있어 아무 문제없이 자연분만에 성공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출산 직전 병원에서는 산모가 고령이라 자연분만이 위험하다며 제왕절개수술을 권유했다. 태아와 자신의 건강을 위해 자연분만을 꿈꿨던 박씨는 할 수 없이 무통주사를 맞고 분만대에 올라 제왕절개수술로 아이를 낳았다.
사회ㆍ경제적 이유로 늦게 결혼해 아이를 가진 35세 이상 고령 산모 중 태아와 자신의 건강을 위해 자연분만을 선호하는 이가 증가하고 있지만 실제로 자연분만으로 출산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산부인과 전문의들은 “35세 이상 고령 산모가 자연분만에 성공하려면 전제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선 골반이 좁아 아기가 산도(産道)를 통과할 수 없는 협골반이면 자연분만이 불가능하다. 여기에 고혈압, 당뇨병, 비만 등 내과 질환이 있는 임신부도 제외된다. 태반이 정상 위치보다 아래쪽에 자리 잡아 자궁 안 구멍을 막은 전치태반 등 태반에 문제가 발생해도 안 된다. 태아 체중이 너무 크거나, 태아가 선천성 기형이면 자연분만 대신 제왕절개수술을 선택해야 한다.
“검사 문제 없으면 고령이라도 자연분만”
하지만 이런 전제조건을 충족하면 고령 산모라 할지라도 자연분만이 가능하다.
송지은 강남성심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산모 골반이 협골반 소견이 없고, 태아와 태반상태가 양호하면 고령 산모라도 자연분만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환욱 대한산부인과의사회 학술이사(메디플라워 산부인과)는 “산전검사에서 문제가 없는 임신부라면 진통관리만 잘하면 100명 중 95명은 자연분만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고령 산모들이 자연분만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제왕절개수술로 인한 합병증이 두려워서다. 산부인과 전문의들에 따르면 제왕절개수술 중 자궁열상, 방광손상, 장 손상과 함께 감염도 생길 수 있다. 수술 후에는 자궁내막염, 상처감염, 골반혈전정맥염, 요로감염, 위장관계합병증, 심부정맥혈전증에 노출될 수 있다. 의료사고도 발생할 수 있다.
최근 서울 강남에 있는 분만전문병원에서 아이를 출산한 K씨는 제왕절개수술 뒤 극심한 복통에 시달려 검사한 결과, 배 안에 거즈가 있는 것이 발견돼 재수술을 했다. K씨는 “자연분만을 해준다고 해서 이 병원을 선택했는데 이 같은 일이 생겼다”며 “제왕절개수술한 산모와 자연분만한 산모의 환자복이 달라 모욕감까지 느꼈다”고 분개했다.
산부인과 전문의들에 따르면 자연분만을 하면 제왕절개수술을 받는 것보다 회복이 빠르고, 감염 위험성도 낮다. 정신적인 효과도 크다. 이귀세라 성빈센트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진통이란 극심한 고통을 이겨내고 분만에 성공했다는 자신감과 만족감을 얻을 뿐 아니라 태아와 고통을 공유해 아기에 대한 사랑이 배가된다”고 말했다. 태아에게도 이롭다. 태아의 폐 기능이 좋아지고 면역력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 낳는 공장’ 전락한 대형병원 문제
산모와 태아에게 도움이 되는 자연분만이 활성화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산부인과 전문의들은 출산인프라 붕괴를 꼽는다.
우선 동네 산부인과의원이 사라지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04년에는 49.9%가 의원에서 출산했다. 하지만 10년 뒤인 2014년에는 38.4%만 의원에서 아이를 낳았다. 익명의 한 산부인과 전문의는 “과거 동네 산부인과의원에는 의사와 조산사가 있어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연분만을 권했다”면서 “대형 분만전문병원이 득세하면서 병원 경영이 힘들어진 동네의원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갈수록 대형화하는 일부 분만전문병원은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 이들 병원은 언제든지 제왕절개수술이 가능토록 마취과ㆍ소아과 전문의들을 확보하고 있다. 대형 분만전문병원에서 일했던 한 산부인과 전문의는 “이들 병원에서는 산모와 태아를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잠재적 환자’로 인식하고 있다”면서 “산부인과 전문의 1명 당 한 달에 40~50명 아이를 받아야 병원운영이 가능하므로 현실적으로 자연분만을 권장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또 “밀려드는 산모로 진통실과 분만실이 부족해 병실회전율을 올리려면 촉진제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면서 “산모가 고통을 호소하면 무통주사를 투여해 분만을 재촉했다”고 말했다. ‘아기 낳는 공장’으로 전락한 일부 대형 분만전문병원의 민 낯이 드러난 것이다.
이에 따라 일부에서 병원과 의사 중심 출산시스템을 산모와 태아 중심 시스템으로 전환돼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정 이사는 “현재 국내에서 자연분만은 제왕절개수술을 하지 않는 분만을 의미할 뿐”이라면서 “남편 등 가족이 배제될 수밖에 없는 의사중심 출산시스템을 가족중심 출산시스템으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