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패션은 왜 꽃을 그리워하는가

2016-04-22 (금) 김홍기 패션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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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벌의 옷만큼 계절의 변화를 찬연하게 노래하는 것이 있을까. 올 2016년 봄 패션 트렌드 중 하나가 맥시멀리즘이다.

말 그대로 과다할 정도로 많은 꽃들이 런웨이를 채웠다. 1947년 1월 패션 디자이너 크리스천 디올은 뉴룩을 발표하면서 프랑스 여인들을 열광시켰다. 당시 디올이 발표한 코롤레(Corolle) 라인은 단어 의미대로 꽃봉오리를 주제로 삼았다. 가는 허리와풍성하게 퍼지는 플레어스커트는 프랑스가 패션의 중심이었던 19세기 후반의 향수를 불러일으켰고, 나치 치하에서 핍박 받던 시절의 집단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수단이었다.

파리의 오트 쿠튀르 컬렉션엔 매년 꽃의 이미지와 무늬가 등장한다.


꽃을 비롯한 자연은 건축과 실내장식, 디자인, 각종 공예에 이르기까지 모든 창작 활동의 중요한 영감을 불러일으켜왔다. 패션 또한 마찬가지다.

꽃무늬가 프린트된 드레스는 패션의 클래식이다. 유행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기에 영원히 반복된다. 꽃 속에서 인간이 매번 새로운 아름다움의 기준과 영혼의 숨결을 찾아냈기 때문이리라.

꽃은 그 자체로 조형물이다. 형태와 색채, 질감은 디자이너의 창조 본능을 깨운다. 꽃은 종자식물의 생식기관이다. 본질적으로 관능을 품고 있다. 서양문화에서 꽃과 식물은 땅에 뿌리를 두고 하늘을 지향한다는점에서 지상과 천국을 연결하는 사물이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연꽃과 파피루스 꽃을 저승의 통치자 오시리스를 숭배하는 매개로 사용했고 회춘과 새로운 삶을 상징한다고 믿었다. 그리스에서는 아네모네 꽃을 영혼과 연금술의 상징으로 숭배했다.

패션의 역사에서 꽃문양이 옷에 적용된 건 중세 후기다. 14세기 중반 오스만 제국의 첫 수도였던 부르사(Bursa)는 유라시아 무역 루트의 중요한 연결점이었다. 이란 북부지역에서생산되는 견사의 중간 집산지였던 부르사에선 이슬람 권역 내 가장 우아한 최상급 실크와 벨벳이 생산되었다. 특히 카네이션과 종려나무 줄기, 석류와 양귀비꽃을 모티프로 삼아 미려한 광택을 발산하는 금사와 은사로 정교하게 짠 직물들은 이탈리아 상인들을 사로잡았다.

상인들은 이 직물을 궁정의 고급 관리와 상위 종교사제집단에게 팔았다. 그 자체로 지위상징을 나타내는물품이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기, 서구를 사로잡은 꽃무늬 직물은 인도에서 왔다. 친츠(Chintz)라 불리는 이것은 다채색 소형 꽃무늬로 뒤덮인 면직물이었다. 친츠는 이 시기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통해 유럽에 수입했다. 값비싼 직물의 제조방법을 복제하지 못한 탓에 영국은 1680년경부터는 아예 수입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1759년 영국의 직물제조업자들은 제작 비밀을 알아냈고 결국 염가로 대량생산의 길을 열게 된다.


19세기 산업혁명과 더불어 직물생산의 양은 10배가 증가했고 기계로 프린트한 친츠 직물은 시장에 쏟아지면서 여성들의 주간용 의상에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꽃무늬에 관해 이야기할 때, 일본과 중국과 같은 아시아의 대담한 꽃무늬 실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에서는 인상주의자들이 중국식 병풍과 기모노를 자신의 그림 속에서 묘사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까지, 서구에서의 동양풍 인기를 견인했다. 특히 이 시대에 제작된직물은 아시아 직물에서 영감을 얻은 양식화된 꽃무늬들이 주를 이룬다. 유기적인 곡선을 이용해 해바라기, 백합, 붓꽃, 수선화 꽃무늬를 표현했다. 꽃무늬는 동양과 서양의 교류와 융합을 상징했다.

1966년 5월 12일 미국에서 건너온 히피 패션이 영국 런던 패션의 진원지 카나비 스트리트에 상륙한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며 평화를 원했던 히피족은 그들의 이념과 사상을 외모로 표현하였다. 자유와 반전의 상징인 꽃은 직물의 프린트나 액세서리로 많이 사용 되었다. 샤넬의 동백꽃만큼 샤넬 브랜드의 정체성을 표현해주는 것도 없다. 꽃이 질 때면 꽃봉오리가 통째로 땅에 떨어지는 자존심 강한 꽃의 면모는 당당한 여성의 이미지를 만들려고 평생을 바친 샤넬의 도발적 면모와 닮아있다.

올 봄, 옷을 통해 피어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겨울의 잔혹함을 이기고 피어난 환한 표정을. 꽃은 그리움일 수밖에 없다.

<김홍기 패션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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