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견·불이익 우려해 쉬쉬, 발병 초기 2주일이 골든타임, 2주 격리·투약하면 전염 안돼
▶ 잠복 감염자 관리가 관건, 젊은층 불규칙 생활·살빼기와 중장년 음주·흡연도 발병 불러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결핵 발생률 1위이다. 호흡기내과 전문의들은 결핵 발생률을 선진국 수준으로 떨어뜨리기 위해서는 환자들이 감염 사실을 떳떳이 알리고 적극적으로 치료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에취~, 에취~.” 회사원 A(42ㆍ남)씨의 지하철 출근 길은 벌써 며칠째 험악한 모습이다. 2주 전쯤 감기 증상과 함께 재채기가 시작돼 감기약을 먹었는데도 증세는 별반 나아지지 않고 있다. 쉼 없이 터져 나오는 재채기에 주변 승객들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A씨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며칠 뒤 다시 찾은 병원에서 A씨는 ‘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발병해도 격리치료 등 피해 우려 쉬쉬
대한민국은 ‘결핵 후진국’이다. 질병관리본부 자료에 따르면 2014년 기준 우리나라 결핵 발생률은 10만명당 86명으로 OECD 회원국 1위이다. 2위인 포르투갈(10만명당 25명)을 큰 격차로 따돌렸다.
결핵은 끈질기면서도 치명적인 질병이다. 결핵의 무서움은 지난해 국가적 재앙을 초래한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와 비교하면 대번 알 수 있다. 지난해 국내 메르스 감염자는 총 186명으로 이중 38명이 숨진 것으로 집계됐다. 결핵에 따른 피해는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2014년 기준 국내 총 결핵환자 4만3,088명 중 81%가 넘는 3만4,869명이 과거 결핵 치료를 받은 적이 없는 새로운 환자(신환자)였고, 같은 해 결핵으로 인한 사망자가 2,305명에 이른다.
‘후진국 병’으로 손꼽히는 결핵은 왜 우리나라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을까.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환자들이 발병 사실을 떳떳이 드러내놓고 치료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마련돼 있지 않은 탓이 크다.
최근 기관지 결핵 진단을 받은 직장여성 A(31)씨 사례는 국내 결핵환자들의 ‘숨죽인 삶’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수 개월 전부터 기침과 가래로 고생한 A씨는 기관지에서까지 통증이 발생하자 병원을 찾았다. 천식인 줄 알았는데 결핵균에 의한 기관지결핵이었다. 기관지결핵은 다이어트 등으로 무리하게 체중을 감량한 젊은 여성들에서 흔하다. 계약직 직원인 A씨는 회사에 자신이 결핵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결핵환자라는 게 알려지면 최소 2주 정도 회사를 쉬어야 하는데 그럴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핵 퇴치를 위해서는 사회적 편견 때문에 발병 사실을 숨긴 채 결핵균을 전파하는 음지의 환자들을 양지로 끌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호흡기내과 전문의들은 “결핵에 걸리면 격리기간이 필요한데 환자들이 경제ㆍ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당할까봐 발병을 숨기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설명한다.
결핵환자 모두가 결핵균을 배출한다거나 또는 결핵환자의 ‘비말(droplet)’을 흡입하게 되면 무조건 결핵에 걸린다는 등 결핵과 관련한 잘못된 인식도 걸림돌이다. 결핵환자라 해도 모두 결핵균을 배출하지는 않는다. 임재준 서울대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결핵균에 감염돼도 10명 중 9명은 결핵에 걸리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결핵 치료의 골든 타임은 ‘초기 2주’다. 심윤수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가래에 결핵균이 나오는 환자라도 2주 정도 결핵 약을 복용하면 전염성이 사라지기 때문에 자신 뿐 아니라 남을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증상 없는 ‘잠복 감염자’ 관리가 최대 관건
공공장소에서 남을 의식하지 않은 채 마구 기침이나 재채기를 하는 등 잘못된 공중위생 습관도 개선이 필요하다. 결핵은 증상이 기침 가래 미열 피로감 등으로 감기와 비슷하다. 이에 따라 환자들은 대부분 증상이 나타나더라도 자각하지 못하거나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므로 부지부식 간에 병을 옮기기 쉽다. 천은미 이대목동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메르스 사태를 겪고도 마스크 문화가 생활화 되지 않았다”며 “기침이나 재채기 할 때 입과 코를 가리는 등 개인 위생수칙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결핵 예방의 지름길”이라고 강조했다.
일반적으로 침 방울이 날아가는 속도는 기침 시 초속 10m, 재채기 시 초속 50m다. 또 재채기를 한 번 할 때마다 100만 개 정도의 침 방울이 튀어 나온다. 마스크를 쓰고 손을 철저히 씻는 것이 ‘생명수칙’인 셈이다.
우리나라가 결핵 후진국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잠복감염자’ 관리가 최대 관건이 될 전망이다. 결핵균이 몸에 침투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결핵을 앓지는 않는다. 우리 몸의 면역체계가 결핵균의 체내 활발한 증식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결핵균은 마치 잠이 든 것처럼 몸 속에서 조용히 웅크린 채 지내게 되는데 이를 ‘잠복감염’ 상태라 한다. 호흡기내과 전문의들은 “사람에 따라 수 년, 수십 년 잠복감염 상태가 유지될 수 있다”며 “잠복감염 시에는 증상이 없고 다른 사람에게 결핵을 옮기지도 않는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면역체계가 결핵균을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 약해지면 문제는 달라진다. 인간면역부전바이러스(HIV) 감염에 의한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AIDS) 환자, 영양 결핍 환자, 당뇨병환자 등은 결핵균이 면역체계를 파괴하고 ‘활동성 결핵’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제가 될 수 있는 게 바로 노인층으로 편입된 베이비부머 세대(1955~1963년 생)다. 임 교수는 “면역력이 떨어지는 노년층이 급증하고 있어 결핵환자가 감소하진 않을 것”이라면서 “특히, 당뇨병에 걸리면 면역체계가 억제돼 결핵에 걸리기 쉽다”고 했다. 최재철 중앙대병원 호흡기알레르기내과 교수는 “결핵을 잡기 위해 내년부터 고교 1학년과 만 40세 국민을 대상으로 한 ‘생애주기별 잠복결핵 검진’이 실시되지만 효과는 20년 후 보게 될 것”이라면서 “현재 40대 이상 국민의 30~40%는 여전히 잠복감염자이기 때문에 개인은 물론 국가적으로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환자 30%가 20~30대… 술ㆍ담배 찌든 40~50대도 위험
20~30대도 결핵 발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전문의들은 스트레스, 불규칙한 생활, 다이어트, 과로 등 원인 때문에 20~30대에서도 결핵환자가 증가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심 교수는 “우리나라 결핵환자의 30% 정도가 20~30대”라면서 “과도한 입시 스트레스, 운동부족으로 인한 체력저하, 불규칙한 식사 등으로 면역력이 저하된 청소년들도 결핵에 걸릴 위험성이 높다”고 했다.
만성적으로 흡연과 음주에 노출된 40~50대 남성들도 결핵에 걸릴 확률이 높다. 최 교수는 “담배는 결핵 유발 인자”라면서 “흡연자는 치료 해도 예후가 좋지 않다”고 했다. 임 교수는 “흡연자는 결핵균에 감염될 확률뿐 아니라 사망률도 높다”면서 “우리나라에서 결핵환자가 많은 것은 흡연자가 많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정부의 결핵 퇴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핵환자 발생률이 가시적으로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치료 중 자의적으로 약 복용을 중단해 내성이 생긴 ‘다제내성 결핵’ 환자가 많기 때문이다. 심 교수는 “결핵균은 매우 끈질기므로 완치 전에 약 복용을 중단하거나 불규칙적으로 먹으면 결핵균에 내성이 생겨, 결핵 초기에 복용한 약보다 효과가 적고 부작용이 큰 2차 약을 장기적으로 투여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다제내성 결핵이 발생하면 완치 가능성은 줄어드는 반면 사망률은 높아진다. 호흡기내과 전문의들은 “결핵 치료는 최소 6개월에서 1년이 소요된다”면서 “치료기간에는 반드시 금주와 금연을 실천하고, 증상이 덜해졌다 해서 자의적으로 약 복용을 중단하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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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중 의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