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기애 성향 강할수록 위험, 누구와 있는지 행동통제서 정서·신체적 폭력으로 악화
▶ 여성들의 인식 전환 필요, 단순한 일회성 일탈 아닌 엄연한 폭력임을 인지해야
데이트 폭력 중 가장 먼저 한 행동 (단위:%)
30대 중반 남성 A씨는 현재 교도소에 복역 중이다. 그는 지난해 고시원에서 만나 교제하던 여성이 다른 남자와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로 얼굴을5~6회 때렸다. A씨의 폭력은 이에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자 함께갈 것을 요구했다 거부 당하고 헤어지자고 말까지 하자청소기로 여성을 3~4회 때린 후 발로 걷어찼다. 결국 그는 폭력과 상해 등 혐의로 징역 1년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최근 연인 사이에서 ‘데이트 폭력’ 발생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달 22일 대검찰청 범죄분석 자료에 따르면 지난 10년 간 연인에 의한 피살이 1,000명에 이른다. 매년 100명 정도가 데이트 폭력으로 삶을 마감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기간 데이트 폭력에 따른 성폭력 범죄 피해자는 4,000명, 폭력 범죄 피해자도 7만3,864명에 달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폭행, 협박, 성폭력 등 데이트 폭력을 당하는 여성이 매일 20여명 꼴로 발생하고 있다. 왜 이런 참극이 멈추지않을까.
“자기애성 강한 남자일수록 더 위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에 따르면 자기애성 성향(narcissistic personality)이 강한 남자일수록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로 돌변하기 쉽다. 남성은 주도성 적극성 충동성 공격성에서 여성보다 강하다. 그런데 남녀관계에서 이런 주도성이 실현되지 않을 때, 상대에게 자신의 주장이나 요구를 거절 당해 좌절감에 빠졌을 때 충동적, 공격적 본색을 드러내기 쉽다는 것이다.
강동우 강동우S의원 원장은 “자기애성 성격의 남성은 상대에게 거절 당하거나 자신의 의견이나 행동이 수용되지 않았을 때 분노조절 실패로 이어져 폭력을 휘두르기 쉽다”고 했다. 데이트 폭력의 밑바탕에는 충동적이고 공격적인 남성의 자기애성 성향이나 뿌리 깊은 열등감이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것이다.
데이트 폭력은 어린 시절 경험한 폭력의 트라우마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 즉, 어릴 적 폭력을 직접 경험하거나 목격한 사람의 경우 자신을 표현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또는 상대를 통제하거나 지배하는 방법으로 폭력에 의존하기 쉽다는 것이다. 이른바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공격자와 동일시(identification with aggressor)’ 현상이다.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을 때 직접 싸워 이기던가 또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그 마수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괴롭힘을 계속 받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새 가해자와 닮은꼴이 된다는 이론이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주로 주체성이 부족하고 자기를 괴롭히는 대상에 대한 불안감이 클수록 (공격자와 동일시 현상이) 잘 일어난다”면서 “이 단계에 이르면 억눌리고 쌓인 분노를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표출하는데, 데이트 폭력도 이에 해당한다”고 했다.
어린 시절 부모의 보살핌을 잘 받지 못한 경우에도 커서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가 되기 쉽다.
-행동통제로 시작, 정서ㆍ신체 폭력으로 악화
‘행동통제’는 데이트 폭력의 흔한 전조신호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19세 이상~60세 미만 성인남녀 4,000명(남녀 각 2,000명)을 조사한 결과, 데이트 폭력 가해 남성들이 피해 여성에게 제일 먼저 보인 행동은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26.8%). 이어 통화가 될 때까지 계속 전화(15.1%), 옷차림 제한(11.3%), 다른 이성을 만나는지 의심(9%), 핸드폰 이메일 개인블로그 등의 잦은 점검(8.4%)의 순이었다.
여성이 행동통제에 따르지 않으면 정서적 폭력이 시작된다. 조사에 따르면 남성이 여성에게 가한 가장 흔한 정서적 폭력 유형은 화가 나 발을 세게 구르거나 문을 세게 닫는 행위(31.4%)였다. 그 다음은 욕 하거나 모욕적인 말(21.5%), 위협을 느낄 정도로 고함과 소리 지르기(18.6%), 악의에 찬 말 퍼붓기(16.1%)였다. 사태가 이런 단계까지 진행되면 남성은 여성에 대한 존중심을 잃고 힘으로 여성에 대한 통제력을 과시하려 든다.
정서적 폭력의 다음 차례는 신체적 폭력이다. 데이트 폭력을 당한 여성들이 가장 먼저 겪는 신체적 폭력은 몸을 힘껏 움켜잡는 행위였다. 가해 남성은 여성의 팔을 비틀거나 꼬집고, 벽 등으로 거칠게 밀치기도 했다. 여기서 더 악화하면 물건을 던지고, 뺨을 때리고, 발로 차는 등 신체를 공격했다. 심지어 목을 조르거나 뜨거운 물이나 불로 화상을 입힌 경우도 있었다.
성폭력도 수반된다. 데이트 폭력을 가한 남성들은 여성이 원하지 않는데도 얼굴 팔 다리 등 몸을 만지고, 여성의 기분에 관계없이 키스는 물론 가슴 엉덩이 성기를 만지기도 했다.
충격은 데이트 폭력의 가해 남성들은 상대 여성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폭력을 가한다는 사실이다.
조은경 한림대 심리학과 교수는 “남성들은 처음에는 공포심을 유발하면 여성이 두려움에 자신의 요구에 반응할 것이라 착각한다”면서 “하지만 협박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자신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 관계 복원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상실감을 느끼지 않으려 폭력에 집착한다”고 했다. 조 교수는 이어 “이런 남성들은 여성을 학대하고 괴롭히는 행위가 사랑이라 굳게 믿고 있다”면서 “사랑과 폭력의 감정을 구별하지 못해 최악의 경우 연인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했다.
-남성의 ‘일회성 일탈’ 착각이 화 키워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데이트 폭력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여성들의 인식도 개선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상대 남성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여성 중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응답이 74.8%에 달했다.
왜 여성들은 데이트 폭력에 소극적으로 대응할까.
이는 여성들이 남성의 데이트 폭력을 단순한 ‘일회성 일탈’로 여기는 것이 한 원인으로 지적된다. 연애 초기 남성들은 여성에게 자신의 가장 멋있고 좋은 모습을 내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를 지나치게 소유하려 하거나 의심하는 것도 모자라 욕설이나 폭력을 가한다면 문제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도 여성들은 “나를 너무 사랑해서 생긴 일”이라거나 “잘못을 시인했으니 다신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거야”라며 문제를 덮는다.
개방된 성풍조 속에서 잦아진 남녀 관계가 약점 아닌 약점으로 작용하는 것도 여성들이 데이트 폭력에 미온적 태도를 보이는 한 원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장형윤 아주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남성과 달리 여성은 성관계를 갖게 되면 남성에 문제가 있어도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등은 특히 20대 초ㆍ중반 여성들의 경우 데이트 폭력에 노출되기 쉽다고 경고한다. 조은경 교수는 “여성은 20대 초ㆍ중반 무렵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데이트 폭력에 노출되면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고통 받을 뿐 아니라 자신이 존대 받지 못하는 여자라며 자존감을 상실하게 돼 인생 전체가 망가질 수 있다”고 했다.
데이트 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방법은 없을까.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상대 남성이 욕설이나 폭력을 한 번이라도 행사하면 그 행위에 대해 정신과적 상담이나 치료를 받을 것을 요구해야 한다”면서 “지적에도 불구하고 폭력적 행위가 또 다시 발생하면 빨리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화를 면하는 길”이라고 했다.
연성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영국에서는 가정폭력 전과공개 제도를 통해 폭력 가능성이 있는 연인의 전과기록을 조회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폭력을 예방하고 있다”면서 “지능적이고 폭력적인 데이트 범죄가 증가하고 있는 만큼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특단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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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중 의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