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악산~남산~인왕산 잇는 18.2㎞
▶ 서울성곽길 오르며 왜군·청군 침략 역사 되새겨
한양도성은 성 밖과 안을 나누는 경계였지만 지금은 동과 동, 구와 구를 나누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사진에 보이는 성곽의 왼쪽은 성북구, 오른쪽은 종로구다.
산행을 마치자 청와대 쪽으로 뻗어 있는 4차선 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서울에서 가장 한적한 이 길은 창의문에서 내려다보는 풍경도 아름답지만 청와대에서 올려다보는 풍경 또한 아름답다. 경복궁 앞에 있는 직장에서 일산의 집까지 10여년간 출퇴근하며 오가던 도로는 어디에 나무가 있고, 또 어디에 성벽이 있는지 내 뇌리에 고스란히 각인돼 있었다. 하지만 북악산 줄기를 따라 이어지는 성곽길은 올라 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 차를 타고 스쳐 지나며 올려다봤던 성곽길을 구경하기 위한 여정은 이른 아침 지하철 한성대역에서 시작됐다.
풍수지리상으로 북 대문이 있으면 북쪽 의 찬바람이 들어온 다는 믿음 때문에 북문 격인 숙정문은 작게 축조됐다. 그 나마도 조선조 때는 거의 닫혀 있었다.
산행의 시작은 혜화문에서부터였다. 한성대역을 나와 시작한 백악구간 취재는 혜화문에서 와룡공원으로 이어졌다. 해설사 문찬호씨는 “성북동과혜화동을 경계 짓는 한양도성은 한국가의 수도를 방비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곽”이라고 설명했다. 성곽은 성 밖과 안을 나누는 경계였지만 지금은 동(洞)과 동, 구(區)와 구를 나누는 역할을 하고 있고 가끔씩 나타나는 초소에는 수도방위사령부 소속 병사들이 청와대를 지키고 있다. 문씨는 "혜화문에서 시작해 창의문까지 이어지는 백악구간 중 와룡공원과 말바위 안내소 사이는 외교관저들이 많은 성북동과 가까워 외국인 산책객들이 많다"고 말했다. 성곽길의 진가를 외교관들이 제대로 알아본 셈이다.
옛날에 사람들이 말을 타고 와 묶어놓은 데서 유래됐다는 말바위는 가파르고 길이 좁아 실제로 말이 올랐는지 의구심이 일었다. 말바위를 지나치면 오른쪽 성곽 너머로 성북동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 너머 북쪽으로 수많은 저택 중 조선기와를 얹은 한옥이 한 채 보이는데 이곳이 지난 1970년대 요정정치의 산실이었던 삼청각이다. 지금은 세종문화회관에서 운영하고 있는 삼청각은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린 곳으로도 유명하다.
1’·21사태 소나무’에는 지난 1968년 무장공비들과의 교전 때 총탄이 박힌 자국 이 선명히 남아 있다.
서울성곽은 도성을 지키는 요충이었던 만큼 전쟁과 풍수에 얽힌 일화도 많다. 서울성곽을 출입하는 문들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남대문과 동대문뿐이다. 풍수지리상으로 북대문이 있으면 북쪽의 찬바람이 들어온다거나 음기가 들어와 도성의 여인들이 바람 난다는 믿음이 있어 북대문을 대신하는 작은 규모의 숙정문만 축조한 것이 그 이유다. 그나마도 조선조 때는 거의 닫아놓는 경우가 많았다.
서대문이 없어진 것은 일제가 1915년 시구역 개수계획의 일환으로 헐어버렸기 때문이다. 일제는 임진왜란때 왜군이 선조가 줄행랑을 치면서 활짝 열어놓은 남대문과 동대문으로 입성했다는 이유로 두 대문을 존치했지만 청나라 군대가 드나들던 서대문은 허물어버린 것이다.
왜군과 청군의 침략에는 속절없이 당했던 도성이지만 제구실을 한 것은 임진왜란도 병자호란도 아닌 1·21사태 때였다. 32명의 무장공비가 침투했던 1968년, 공비들은 서울성곽이 가로막고 있는 인왕산 루트 대신 시내버스를 탈취해 도로로 들어왔다.
이때 교전에서 32명 중 30명이 사살됐고 사로잡혀 훗날 목사가 된 김신조와 휴전선을 넘어 북한으로 도주한 박재경만 살아남았다. 북으로 가영웅이 된 박재경은 인민무력부 중장까지 올랐고 김대중 정부 때 송이버섯 선물을 가지고 방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날의 상흔은 백악마루를 지나면 버티고 선 ‘1·21사태 소나무’에 탄흔으로 남아 있다.
경복궁을 왕궁으로 잡은 이유도 재미있다. 무악 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면 조선왕조가 1,000년 갈 것이고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면 500년을 이어갈 것이며 200년 후 큰불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주산은 북악으로 정해졌고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200년 후 임진왜란으로 도성을 빼앗기면서 경복궁이 불에 탄 것이다. 지금은 중턱 군데군데까지 집들이 들어선 북악산이지만 조선시대에는 호랑이들이 득실거려 세조가 이곳에서 범사냥을 하기도 했다. 얼마 전 개봉했던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이 범사냥을 다녀오며 김종서를 겁박하던 장면이 허구는 아닌 셈이다.
실제로 조선왕조는 범을 박멸하기 위한 착호군을 운용하기도 했다. 착호군들은 일반병사보다 보수가 좋아 인기가 높고 사격술도 뛰어났다. 19세기 조선을 침범했던 프랑스와 미국 군대는 조선 착호군들이 자신들이 보유한것보다 수백 년 전에 제조된 구식 총으로도 신묘한 사격술을 구사하는 것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