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시대 식민지 백성으로서 시 쓰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할 수 없었던 자신이 부끄러웠던 시인. 생전에 변변찮은 시집 한권도 출판하지 못했던 시인. 해방된 조국이 가장 좋아하는 시를 쓴 시인. 바로 시인 윤동주의 삶을 다룬 영화가 나왔다.
이준익 감독의 신작 '동주'는 같은 해 한 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촌지간인 윤동주와 송몽규란 두 인물을 통해 일제 강점기 청년들이 느껴야 했던 고민과 울분을 그리고 있다.
동주(강하늘)와 몽규(박정민)는 둘 다 문학을 좋아했던 소년이었다. 하지만 동주는 시를, 몽규는 산문를 좋아했다.
시와 산문의 차이일까, 내성적인 동주와 달리 몽규는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거침없이 행동한다. 19세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했다가 옥고를 치르고 요시찰 인물로 일제에 감시당한다.
나란히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간 동주와 몽규는,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막 벌이면서 조선에 대한 수탈의 고삐를 조이자 일본으로 유학길을 떠난다.
어차피 조선에서 조선말로 문학하지 못할 바에는 일본에 가서 제대로 배우기라도 하자는 것이 동주의 생각이었다.
몽규의 속셈은 달랐다. 식민지 조선의 해방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고 일본에 간 몽규는 그곳에서도 독립운동을 벌인다.
결국 둘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히게 된다.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는다.
동주는 29세인 1945년 2월 16일 형무소에서 숨지고, 몽규는 그해 3월 10일 동주를 뒤따른다.
영화는 일본 고등형사가 동주와 몽규를 취조하는 장면과 이들의 과거 삶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동주와 몽규의 일대기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취조 장면과 회상 장면이 마침내 같은 시간대로 들어오는 시점인 영화 후반부에 두 인물의 응축된 감정이 서로 다른 양태로 폭발한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영화는 윤동주 시인의 시 10여편을, 동주가 자신의 심정을 내적으로 말하는 형태로 들려준다. 관객은 이를 통해 동주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시가 어떤 배경에서 쓰였는지를 알게 된다.
물론 극중 시가 쓰인 시기와 실제 연표상 해당 시가 작성된 시기가 다른 부분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최대한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도록 했다고 이준익 감독은 말했다. 이 영화의 70%가량은 '팩트'이고 나머지 30%는 가공의 내용이라는 것이 이 감독의 전언이다.
영화는 흑백으로 촬영됐다. 감독은 윤동주 시인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인 '흑백사진 속 윤동주'를 구현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한번도 컬러로 촬영하겠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비용 절감 목적도 있었다고 했다.
영화는 시인 윤동주의 삶을 그리고 있고 제목도 그의 이름을 땄지만, 송몽규란 인물이 '숨은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 감독은 "윤동주는 과정은 보잘 것이 없지만 결과가 좋은 반면 송몽규는 과정이 훌륭하나 결과가 없었다"며 "과정이 아름다웠던 사람이 잊혀지고 무시된 역사를 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 목표였다"고 설명했다.
동주와 몽규를 연기한 강하늘과 박정민의 연기도 돋보였다. 역사적 인물을 연기해야 하는 중압감이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강하늘은 "촬영하는 날들은 압박감으로 잠 못 이루는 나날들이었다. 마지막 촬영 날 모든 집중력을 쏟아붓고는 대본을 학사모 던지듯 던졌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박정민은 "매일 매일이 긴장과 걱정의 나날이었다"며 "열심히 연기하려고 했는데 죄송하다"며 이날 기자 간담회 때 눈물을 글썽거리기도 했다.
그는 특히 송몽규를 연기한 후 삶의 태도가 바뀌었다고 한다. 그전에는 자기만 아는, 의식이 없는 청년이었는데 현실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는 것이 그 변화.
박정민은 "사소하게는 역사에 흥미를 갖게 돼 동영상 강의를 찾아보고 서점에서 관련 책도 찾아보게 됐다"고 말했다.
윤동주 시인의 친한 친구 중 한명이었던 문익환 목사가 극중에 잠시 등장하고, 문 목사의 아들인 배우 문성근이 극중에 정지용 시인으로 출연하기도 한다.
영화의 제목이 '동주'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조상이 물러준 성을 버리고 '히라누마'(平沼)로 창씨개명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상징하는 듯하다.
2월 18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11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