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72) 남북전쟁 (Civil War ) (4)

2015-10-02 (금)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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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 초기의 전투상황4년이 넘도록 계속된 남북전쟁 중의 전투상황을 몇 줄의 글로 그려낸다는것은 아주 어려운 일인데 비록 미국의 국운이 그 전투들의 승패에 달려있기는 하였지만 미국역사의 연구를 위해서 상세한 전투내용을 다 알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과 북의 인구나 국가자원의 엄청난 차이로 보아서, 지금 이 시점에서 볼 때에는 대의명분으로 보더라도, 북쪽이 이기게 되어있는 전쟁이기는 하였으나 때로는 북부가 패배할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싸워온 남부의 투혼에 놀라게 된다.

어느 전투에서 남북군들에게 각각 같은 수의 전상자가 났다거나 같은양의 물자손상이 있었다면 항상 병력과 물자가 모자라던 남부군에게는 두세배의 타격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남북전쟁 중에 남북을 막론하고 탁월한 지휘관들이 있었는데 항상 열세의 병력으로 북군을 혼비백산하게 하였던 남군의 Robert Lee, Stonewall Jackson 두 장군의 용맹한 작전은 미국 군사역사에 기록되어야만할 무공들이었다.


남북 양군이 다 무자비한 전술을 썼겠지만 전쟁말기에 조지아 쪽을 섬멸한 북군의 Sherman 장군은 공격하는 수하 군인들에게 보급물자를 고의로 주지않고 모든 필요물자를 적에게서 약탈하여 쓰도록 하였고 농사와 운송에 필수적인 말, 나귀 등을 전부 압수고, 남부의 고사작전을 위해서 군수물자로 쓰일 수 있는 모든 물자는 약탈해 오고 가져 올 수 없는 모든 것들은 건물, 철도, 공장, 창고할 것 없이 완전히 불태워 버리는 초토화작전을 썼으니 장기적으로 볼 때에 훨씬 더 잔인한 전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도토리 몇 개를 두고 다람쥐들이 정신없이 싸우다보면 저도 모르는 순간에 독수리에게 잡혀 먹힐 수가 있다. 미국의 남북전쟁을 얘기할 때 흔히 간과하기 쉬운 점이 그때의 미국이 마음놓고 내부전쟁을 할 수 있던 나라이었던가 하는 점이다. 유럽의 강대국들이 미국이라는 병아리를 채가지 않은 데에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첫째 강대국 영국과 프랑스 간의 적대, 상호 견제적 관계때문에 어느 한나라가 자국의 이해관계만으로 일방적인 행동을 할수 없었던 국제관계가 있었다.

노예제도를 반대하고 있었던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은 북부쪽에 대의명분이 있다고 생각하였던 까닭에 남부 CSA를 국가로 승인한 나라가 하나도 없었다. 남부쪽에서는 생존을 위해서 유럽과의 무역재개와 유럽의 국가승인이 급선무이었다.

CSA 는 영국과 프랑스에 가는 두 특사를 쿠바 에서 영국상선 Trent 호에 타게 하였다. 특사파견의 정보를 얻은 미국해군은 1861년 11월에 항해중이던 Trent 호를 정선시키고 승선하여 CSA 의 두 특사를 체포하였다.

영국은 중립국의 해상운항을 저지하고 두 특사를 불법 체포하였음을 미국에 항의하였는데 미국과 전쟁을 해야 한다고 영국 국민의 여론이 들끓자 영국은 군인 8,000명을 캐나다 로 파병하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링컨 은 Seward 국무장관이 영국에 공식적으로 사과하게 하고 CSA 의 두 특사를 즉시 석방함으로써 위기를 수습하였다.

남북전쟁 중에 새로 등장한 무기가 철갑 해군함정이었다. 남부쪽에서 4인치 두께의 철판을 원래 북부해군함정 목조군함 이었던 Merrimack 호에 씌워Virginia 호라고 명명한 후 선수쪽에 공격용 큰 철봉을 장착한 후 돌격과 함포사격으로 해상봉쇄 중인 북부의 최대함정들을 침몰시키고 유유히 귀항하였는데, 그 다음날인 1862년 3월 9일에 북부쪽에서 이미 건조해둔 철갑선 Monitor 호가 철갑판 위에 함포 두 개를 장착하고 나와 Virginia 호와 일대 함포격전을 네 시간 동안 벌였으나 양쪽 군함들이 부숴지지 않은 채 무승부로 귀항하였다.

남북전쟁 중에는 철갑선의 활약이 더 없었지만 이때부터 미 해군에는 목조군함들이 서서히 철갑선, 철선으로 바뀌기 시작했다고 한다. 남부쪽에서는 8인승으로 인력을 동력으로한 잠수함이 나왔으나 큰 성과를 얻지 못하고 수장되어 버렸다고 한다.


남북 양쪽이 다 병력의 부족이 심각해지자 양쪽이 다 의무징병제도를 시행하였다. 북쪽에서 20세- 45세의 징병이 시작되자 뉴욕시에서는 나흘 간 소요가 일어났고 징병을 면제받기 위해서는 300달러을 내거나 대리인을 내세우면 되었다고 한다. 자원 지원병에게는 1,000달러의 보상금을 주는 제도를 만들자 같은 사람이 탈영과 지원을 반복하는 일들도 많았다고 한다.

남부에서는 소유노예 20인당 한명씩의 백인주인을 면제 시켜주는 등 불공평한 점들이 많아서 징병제도가 제대로 집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남북전쟁 때에 미개척지인 서부로 옮겨간 사람들이 30만명이나 되었는데 농토개발을 위해서나 금.은을 캐러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병역기피를 위해서 간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남북전쟁은 주로 세개의 전투지역이 있었다. 첫째 버지니아 주 리치몬드와 워싱턴D.C. 와의 사이, 둘째 오하이오의 Cumberland 강과 Tennessee 강들이 만나는 계곡, 셋째로 미시시피i 강의 계곡 등이었다. 그러나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던 곳은 북쪽으로는 포토맥 강, 남쪽으로는 제임스 리버 강, 동쪽으로는 대서양, 서쪽으로는 블루릿지 마운틴 사이에 있는 좁은 동부지역이었다.

이 지역에서 남부의 Robert Lee, Stonewall Jackson 장군들은 열세의 병역으로 신통치않은 지휘를 받고 있던 더 큰 병력의 북부군들에게 번번히 승전하고 있었다.

남부의 수도인 버지니아 주 리치몬드를 전격적으로 점령하면 남부를 쉽게 패배시킬 수 있다는 안이한 생각으로 제대로 훈련되지도 않은 3만명의 병력으로 1861년 7월에 침공하려다가 워싱턴 D.C. 에서 남쪽으로 35마일 지점인 Bull Run 이라는 지역에서 2만명의 남부군에게 도리어 패전하여 워싱턴 D.C. 로 후퇴하였다. 남부군의 이 첫 승전은 남부군에게 북군의 전투력이 보잘 것 없다는 오판을 하도록 하였다.

Bull Run 전투의 패전으로 북군은 George B. McClellan 장군을 사령관으로 교체하였다. 아직 35세도 않된 McClellan 장군은 웨스트포인트 출신으로 더러 유능한 작전을 한적도 있었으나 링컨대통령을 자주 험담하고 항상 부대의 전투참여를 주저하거나 전투의 실기를 자주한 맹랑한 장군이었는데 종국에는 1864년 대통령선거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써 링컨에 도전하여 형편없이 낙선한 인물이다.

한편 테네시 강과 Cumberland강들이 있는 서부전선은 웨스트포인트 출신인 유능한 Ulysses S. Grant 장군이 지휘하고 있었다. 그랜트장군은 그가 과음한다는 소문에 휩싸여 1854년에 예편되어 자기 아버지의 회사에서 사무원으로 일하고 있다가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39세의 나이로 군에 복귀하여 서부지역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전체적인 상황을 관찰한 후 필요한 적당한 전술을 찾아내는데 특기가 있었다.

1862년 2월에 그는 테네시 강에서 북부해군과 합작으로 포트 헨리(Fort Henry)를 점령하고 다시 오하이오 주의 Cumberland강에서 역시 해군과 합작으로 Fort Donaldson 기지를 점령하여 남군 만4천명 을 포로로 잡았다. 그 여파로 내쉬빌이 거의 저항없이 북쪽의 수중에 들어 갔다. 그는 다시 테네시 강 끝까지 북상하여 1862년 4월에 Shiloh Church 라는 지역에 4만명의 장병을 이끌고 들어갔으나 남군의 저항이 완강하여 북군 13,000명, 남군 11,000명의 전사자를 낸 끝에 남군사령관 Johnston 장군이 전사하고 북군이 겨우 승전하였다.

또 1862년 4월 26일에는 David G. Farragut 제독은 북부해군의 근소한 해군함정들의 손실끝에 미시시피 강 입구에 있는 남부해군들을 섬멸하고 “Queen City of the South ” 라는 뉴올리언스를 점령하여 남군의 미시시피 강을 통한 수송력을 완전 차단시켜 버렸다.<계속>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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