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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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70)남북전쟁 (Civil War ) (2)

2015-09-1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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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태환>

또 백인들은 인디언들로부터 바위나 나무를 방패로 쓰면서 전투하는 방법도 배웠다. 남북전쟁 초기에 로버트 리(Robert Lee) 장군이 남부군들에게 야전삽 (spade) 으로 참호를 파고 전투를 하도록 명령하자 그를 “King of Spade” 라고 비꼬았으나 나중에는 그를 명장이라고 부르면서 참호전투를 했었다고 한다.

남북전쟁때 기차가 군수물자 수송에 본격적으로 쓰여지기 시작하였고 적측의 철도와 유선전신 전선을 절단하는것이 아주 중요한 전투목적의 하나 이었다고 한다. 유선전신은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리는데 필수적인 것이었다.


New York Herald 처럼 뉴욕 등지에서 발행되던 때 신문들은 종군기자를 40여 명씩 파견해서 유선전신으로 송고를 받아 전날의 전투를 독자들이 그 다음날 읽을수 있도록 하였으며 그무렵 발명된 사진은 전투장면까지 생생하게 보도하여 일반 국민들도 진행되고 있는 전장의 참상을 알 수 있었다.
 
 장군들은 신문이 군사비밀을 다 신문에 공개한다고 불평하면서 신문기자들을 스파이라고 비난하였으나 신문들은 “이 전쟁은 군인들만의 전쟁이 아니고 국민의 전쟁이다” 라고 응답했었다고 한다. 

남북 전쟁때 지뢰가 처음 쓰여지기 시작하였으며 새 무기와 장비등이 224 가지나 특허를 받았다고 하니 전투방법도 재래식보다 훨씬 더 처참했었을 것이다. 남북전쟁때 본격적으로 등장한신무기‘Rifle’ 은 전투방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전까지는 총구로 화약과 납구슬을 한 개씩 넣어서 방아쇠를 당기면 부싯돌이 진화하여 총알이 발사되는 Musket 라는 총을 썼는데 유효사격거리가 50 야드 밖에 되지 않고 명중률도 아주 얕은 이 총은 비가 오는날에는 발사가 잘 되지 않았던 원시적인 총이었다. 만일 50 야드 까지 접근해온 적을 한방에 명중시키지 못하면 새 총알을 장진하고 있는 사이에 적군은 이미 돌격해 들어오게되는 위험한 총이었다.
 
새로 보급된 Rifle 은 총열에 라선형선을 조각해 놓아 명중률이 높았고 새로운 탄환을 사용해서 유효사거리가 500 야드 까지로 길어졌으며 탄환의 재 장진을 신속히 할 수 있었다. 적군이 유효사거리 500 야드에 들어올때 첫방을 쏘아서 맞지않더라도 코앞에 돌격해 들어오기 전에 몇 발을 더 쏠 수 있는 혁명적인 총이었다. 방어군에게 더 유리한 총이었으나 Rifle 의 등장으로 공격, 방어의 전술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정확하게 누구가 아군이고 누구가 적인지를 구분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시작된 전쟁에 대비해서 Lincoln 은 군인 7만5천명의 동원령을 내렸다. 북부와의 육상교역이 불가능 해진 남부의 해외무역도 금지하기위해 멕시코만과 대서양으로 나가는 해상을 북부해군이 봉쇄하였다.
 
  75세의 년세에도 불구하고 아직 종군하고 있던 북군사령관 Winfield Scot 장군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해상봉쇄를 Conda 작전이라고 불렀다. 이 해상봉쇄로 큰구렁이 아나콘다 가 먹잇감을 감아싸 질식시키는 것에 비유해서 생긴 작전이었는데 남부를 고립시켜 서서히 고사시키는 작전이었다.
 
Lincoln은 먼 장래를 내다보고 판단을 하는 정치인이었으며 큰 목적을 가지고 정치를 했던 지도자 이었던 까닭에 작은 일에 집착하지 않고 유연성있게 또 큰 아량을 가지고 전쟁을 이끌어 나갔다.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의 경력이 별로 대단하지 않았던 점으로 볼때 그의 정치적 능력은 과거의 경험에서 배운 것이라기 보다는 원래 타고난 것으로 보인다. 변하는 사태에대처하는그의 유연성과 현명한 판단력이 발휘되는 한 예를 보기로 하자. 

 Lincoln 은 전통적인 성분상 남부편에 가담하기 쉬운 메릴랜드, 미주리, 켄터키 등의 세 주를 북부쪽으로 끌어 들이는데 성공하였다. 워싱턴 D.C. 는 삼면이 노예주인 메릴랜드에 싸여있어서 만일 메릴랜드가 남부쪽으로 넘어 간다면 북부는 수도를 안전하게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그런데 북부편인 매사추세츠 부대가 메릴랜드 를 행진하고 있을때 주민들이 반대시위를 하고 공격하여 군인 네 명이살해되었을 정도로 메릴랜드는 적대적인 곳이었다. 또 그곳의 언론들은 북부에 아주 비판적 이었으며 선동적인 미합중국 탈퇴주의자들이 날뛰고 있었다.
 
Lincoln 의 고민이 깊어졌다.우리는 더러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부득이 심장이나 폐수술을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음을 안다. 또 민주주의를 “살리기 위해서 독재를 할수밖에 없다” 라는 모순된 소리를 하는 독재자들이 더 많은것도 알고 있다.

Lincoln 은 “헌법 속에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심어놓은 국민의 기본권들이 잘못 악용되어서 헌법이 자멸되도록 만드는 씨앗이 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헌법의 보존을 위해 우리는 헌법에 규정된 국민의 기본권을 잠시 제한할수밖에 없다.” 라고 생각하였다.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이란 짧은 명언으로 민주주의의 기본철학을 만천하에 가르켜준 Lincoln은 국가가 위기를 맞았을 때에는 ‘자유’와 ‘방종’을 구별해서 처리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Lincoln 은 Maryland 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신문을 통제하고 계엄사령관은 난동하는 탈퇴주의자들을 영장없이 구속하고 민간판사앞에서 구속을 항의하는 것조차 금지시켰다. Taney 연방대법원장이 한 탈퇴주의자의 석방명령서를 발부하면서 “국민의 기본권 제한은 국회의 권한에 속하는 일이며 대통령이 자의로 제한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놓았으나 Lincoln 은 대법원장의 명령을 무시하여 버렸다.
 
Lincoln 의 이와같은 “철권정치는 곧 효과를 내어서 메릴랜드는 1861년 6월에는 활당된 군인숫자를 다 채웠으며 미합중국에서 탈퇴하지 않았다. Lincoln 은 미주리에도 비슷한 강경책을 써서 탈퇴를 방지하였으나 켄터키에서는 조금 시간을 늦추면서 주민들의 감정이 돌아서기까지 기다려서 그 주의 탈퇴방지에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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