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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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69) 남북전쟁 (Civil War ) ①

2015-09-1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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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찰스톤

<조태환>

남북전쟁의 시작

남부 주들의 탈퇴에 대한 북부쪽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하였다. 일부의 극렬한 노예 해방주의자들은 비인도적인 남부주들이 제발로 걸어 나가서 잘된 일이라고 하였으며 일부 평화주의자들은 총검으로 남부 주들을 억지로 USA에 매어두는 것 보다는 그들을 평화적 으로 나가도록 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북쪽사람들은 통일된 미합중국이 존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새 대통령 Lincoln의 영도 하에 공화당은 미합중국 존속에 대한 노선이 확고하였다.

독립을 선언한 미연맹국 (CSA) 은 미합중국 (USA) 을 “외국”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자국 영토 내에 외국군대 (미합중국 군대)의 주둔을 허용할 수 없었다. 탈퇴한 주들의 주 방위군들을 동원하여 미합중국 부대들을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미합중국은 군사적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부대들을 충돌없이 내어 주었다. 그러나 사우스 캘리포니아 주의 찰스톤에 있는 큰 기지인 Fort Sumter는 순순히 내어 줄 수 없는 중요한 기지였다.


Lincoln은 1861년 3월4일에 대통령에 취임한 후 곧 Fort Sumter의 식량이 떨어져 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Lincoln 은 미합중국의 존속을 위해서 Fort Sumter 를 순순히 넘겨 주어서는 안된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USA가 군수물자 조달을 강행할 경우 CSA 측과 무력충돌이 불가피할 수 있다는 것과 그런 무력충돌은 남북전쟁의 시작이 될 가능성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만약 전쟁이 불가피할 경우 USA 국민들의 지지와 단합이 자생되기 위해서는 CSA 쪽이 먼저 발포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USA 는 CSA 에게 Fort Sumter 에 군수물자를 보내겠다는 통보를 하였다.

드디어 1861년 4월 12일 새벽에 CSA 포병들이 Fort Sumter 를 포격하기 시작하였고 그날 오후 두시에 Fort Sumter 는 아무 사상자가 없이 항복하였다. 드디어 남북전쟁은 시작되었고 CSA 는 짤막한 전투로 첫번째 USA 에 승리한 것이다. CSA 에게는 USA가 별것이 아니라는 착각을 주었고 USA 측에는 국민단합의 계기가 되었다. Lincoln 의 예상대로 북부사람들은 Fort Sumter 가 남군의 포격으로 허망하게 넘어간 것을 보고 분개를 하여 전쟁불사 여론이 치솟았고 Lincoln 은 즉시 7만5,000명의 병력 동원령을 내렸다.

과연 CSA 가 USA 를 깔보아도 될 만큼 실력이 있었을까? 아마 더 피할 데 없는 귀퉁이에 몰린 쥐가 고양이에게 덤비는 격이었다고 보아야 했을 것이다 . 최초기에 소속이 분명치 않았던 메릴랜드, 켄터키, 미주리 등 세 주를 제외하고 남북전쟁 시작 전의 남부와 북부의 자원을 비교해보기로 하자.

북부의 인구는 2천 만명이었고 남부의 인구는 9백만 명이었는데 그중 3백60만 명은 노예들이었다. 북부에는 2만2,000마일의 철도가 있었는데 남부에는 9,000마일의 철도 밖에 없었다.

북부에는 훨씬 많은 숫자의 공장들과 공장노동자들이 있었으며 현금과 금융신용, 선박, 기관차, 철, 강철, 농기구, 무기들도 북부에 훨씬 더 많았고 기관차는 북부에서만 제조되었다. 북부는 남부 보다 훨씬 더 많은 해운력이 있었으며 북부의 해군에 비해 남군은 해군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북부는 여러 가지의 농산물들을 생산했던 반면에 남부에서는 담배, 쌀, 면화 등 제한된 몇 가지 농산물들을 집중적으로 생산하였던 탓에 이농산물들을 수출해야 다른 필요한 물자들을 수입할 수 있었다.


북부에서는 자신들이 생산한 농기구들을 써서 노동력 절약을 했던 반면에 남부는 값싼 노예를 쓰는 노동집약적 농사를 지었는데, 노예들은 만일 남북전쟁이라도 나면 반동을 할 수도 있고 이미 후방에 들어와 있는 적군으로 돌변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남부사람들 매 세 명당 한 사람은 노예였으므로 남부 백인들은 항상 내전 속에 살고 있는 것 같은 불안 속에서 살아오고 있었다.

남부쪽에서는 노예들을 무장시켜 군인으로 쓰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노예들을 전투 노무자들로도 쓰지 않았다. 전쟁 말기에 이르러 병력이 모자라자 남부는 노예들이 참전하면 전쟁이 끝난 다음 노예로부터 해방해 줄 것이라고 하면서 모병을 하였으나 극소수의 노예들만 남군에 참여하였다.

Lincoln은 1862년 9월22일에 노예해방 포고령을 내려 1863년 1월1일부터 발효되게 하였는데 USA 국회는 전쟁 2년째 말이 되는 1862년 12월부터 노예들도 북부군으로 쓰기로 결의하였다. 남북전쟁 중 18만5,000명의 노예들이 북군에 참전하였고 그중 3만8,000명이 전사하였다. 노예출신의 흑인부대에는 흑인들도 장교로 일하였으며 그들 일부는 스파이로 남부에 잠입해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남부는 전쟁 시작 전에 북부에 대하여 몇 가지 더 크게 혼동하고 있는 것들이 있었다. 그들은 북부가 내부 분열이 심각하여 제대로 전쟁을 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점에서는 전쟁이 시작되면 남부에 있는 반노예 주의자들이 북부쪽에 합세할 것이라고 오산했던 북부도 마찬가지였다.

또 남부는 세계 최대의 면화 생산지 이었던 까닭에 자국들의 방직업 육성을 위해 영국과 불란서가 북부의 해상통제를 풀어주고 남부를
도와 줄 것으로 오산하였다. 또 남부사람들은 자기들이 문화적으로 북부사람들 보다 우월하다는 오만감이 있어서 남부사람 한 명이 ‘미개한 양키’ 대여섯 명 쯤은 어렵지 않게 당해 낼 수 있다는 착각도 하고 있었다.

양쪽은 서로 길어서 6개월 안에 끝내 버릴 전쟁이라고 호언하면서 전쟁에 들어갔는데 양쪽이 다 크게 오판을 했음이 곧 드러났다. 미국역사상 가장 길고 처참한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 전쟁은 19세기에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치열한 전쟁이 되었다.

한 나라의 반쪽이 다른 반쪽과 싸우는 비극적 총력전쟁이었는데 만약 그 기간동안 유럽의 열강이 무력개입을 하였더라면 미국이란 나라 전체가 없어져 버렸을 수도 있던 일이었다.

남북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은 가정이 없었다고 하는데 참전자 열명 중 네명은 사상되어 총60만명 (70만으로 보눈 역사가들도 있음) 이상의 사망자가 났는데 이 숫자는 당시 미국 인구의 2%에 해당되는 것으로, 지금의 미국 인구에 같은 비율을 적용해 본다면 6백 만명이 사망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참전군인들의 평균 연령이 25세였다고 하는데 14세 짜리 어린 군인들도 많았다고 하며 팔이나 다리에 총상을 입으면 제대로 치료를 할 수가 없어서 마취도 없이 위스키 한잔을 먹이고 총상을 입은 팔과 다리를 톱으로 잘라냈다고 한다. 총상뿐만 아니라 병사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결국은 4년 후에 북쪽의 전략상의 우세 때문에 남쪽은 고사하고 말았다.

남북전쟁은 애당초 북부쪽에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다. 가끔 아이들이 놀고 있는 것을 보느라면 두녀석중 먼저 실증이 난 녀석이 제구슬을 다 집어들고 떠나면서 “나 너하고 더 같이 안 놀거야” 라고 말하고 떠나버리면 되는데 이럴때 같이 더놀고 싶은 딴 녀석은 주먹을 휘둘러 강제로 더 놀도록 만들거나 아니면 제 구슬 몇 개를 거저 주면서 달래야 하는 것을 보게 된다.

CSA 쪽 남부주들은 독립선언을 하고 떠나 버리면 되지만 미국의 통일존속을 원하는 USA 측에서는 일일히 개별 주들을 정복해야 하고 또 일단 정복이 되면 그들이 USA에 평화적으로 남아 있도록 하는 정치까지 해야 했던 까닭이다.

남북전쟁은 전략과 전투방법이 그전과는 아주 달라진 전쟁이었다. 중세 유럽에서의 전투는 적국의 군인들끼리만 하던 것으로서 민간인들은 건드리지 않는것이 원칙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종종 전투 현장에 민간인들은 마치 피크닉이라도 온 사람들 처럼 점심을 싸 가지고 와서 전투구경을 한 후 무사히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

이런 전투방법이 백인들이 미국에 와서 아메리칸 인디언들과 싸우면서 바뀌었다.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아이, 여자 할 것없이 전 인구가 동원되어 싸웠다고 하며 백인들은 인디언들의 식량 등을 탈취하고 동네에 불을 지르곤 하였다. 민간, 군인을 가리지 않는 총력전이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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