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권태진의 아프리카 여행기 ⑸

2015-09-0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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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사 등 봉사자 많은 한국인 이미지 좋아

케냐, 40개 이상 다른 부족 살고 있어
국민 총생산 61% 관광산업 수입
나이로비, 아프리카서

케냐 (Kenya)로
오후에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떠나 케냐로 떠나기로 되어있다. 명성병원을 떠나면서 우배씨에게 케냐 나이로비 항공표를 달라고 했더니 표가 준비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내가 준비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케냐까지 항공표는 여행사의 담당이 아니라고 한다. 지금까지 에티오피아 국내 항공은 모두 여행사에서 마련했다. 케냐의 여행도 여행사에서 주선했다. 에티오피아와 케냐의 여행 일정은 모두가 여행사에서 주선하고 안내하도록 되어 있어 당연히 항공표가 준비되었으리라고 생각했다. 책임소재는 나중에 따지고 우선 비행기 스케줄부터 알아보자고 했다.


오늘 타지 않으면 다른 나라에 가는 일정에 큰 차질이 오기 때문에 나는 다소 당황했다.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와 케냐 수도 나이로비간의 항공은 많을 것으로 생각이 되었지만 그래도 신속히 알아보도록 우배를 독촉했다. 일요일이라 항공사 지점들이 모두 문을 닫았으며 다운타운 중심지에 연 곳이 하나 있어 그곳으로 차를 몰았다.

우기가 접어들었다고 하지만 비가 부족한 아프리카에 5일간 있는 동안 비를 보지 못했는데 이날은 소낙비가 줄기차게 내렸다. 3시간 거리도 되지 않는 각각 6백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인근 두 대도시간에도 비행기는 하루 두 번 밖에 없다고 한다.

우배는 에티오피아 항공사와 밀접한 사업관계를 가지고 있어 다행히 항공 표를 구입할 수 있었다. 표를 구입한 후에야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고 호텔을 체크아웃한 후 곧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오후 2시경에 도착하여 우배와 작별을 했다. 5일간의 에티오피아 여행을 마치며 케냐로 가는 4시 비행기를 타기위해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아프리카여행계획은 작년 초에 구상을 하기 시작했으나 케냐에 일어난 일련의 테로 때문에 계획을 중단했다. 작년 2월 24일 뉴욕타임스는 케냐의 테로 기사를 1면에 크게 게재했다. 케냐의 제2도시 Mombasa 지역의 관광지역인 해안 마을들이 무슬림 과격분자들로 인하여 파괴되어 관광객이 끊기여 폐허화 되었다는 기사였다.

1998년 나이로비 다운타운에 소재했던 미국대사관의 폭발로 224명이 죽고 3천여 명이 부상을 입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건이다. 특히 무슬림 극단주의 ISIS는 여행객도 납치한다는 보도 때문에 아프리카 여행을 꺼려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한번쯤은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금년 초 꺼져가는 불씨를 다시 붙이기 시작하고 다시 시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4월 2일 소말리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케냐 수도 나이로비 부근의 한 대학기숙사를 새벽에 침입하여 크리스천 학생들만 골라서 147명을 학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아내는 물론이고 아이들도 여행계획을 중단하기를 바랐지만 여행일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안전한 여행이라는 것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미 에티오피아와 케냐의 여행비를 심바여행사에 완불한 상태며 키리만제로 등반비용 일부도 이미 한국인여행사에 보낸 상태였다. 30년 전에 써 놓았던 유언을 수정하고 내 개인 은행구좌에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잔금을 아내명의로 수표 한 장 써놓았다. 그러나 나는 신변에 위험에 대한 염려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만일을 위해 정리를 했다.


케냐에도 40개 이상의 다른 부족이 살고 있다. 2014년 추정으로 인구는 4,500만에 국토는 남북한의 2.5배 이상이다. 국민 총생산의 61%가 관광산업의 수입이며 아프리카에서 경제규모가 가장 크고 발전된 나라의 하나지만 아직 가난한 개발도상국이다.

2014년 보고에 의하면 국민생산 PPD가 $2,790, GDP는 $1,269으로 아프리카에서는 비교적 높은 편이다. 기독교인이 국민의 83%, 그 중 47%가 개신교 23%가 가톨릭이다. 무슬림교도가 11%이며 인도의 힌두교도들도 30만 명 이상이다.

케냐는 중장거리 육상에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나라로 수 차례 올림픽에 마라톤과 중거리 육상에 우승하는 영예를 가졌다.
케냐는 오바마 대통령의 아버지의 나라다. 그는 하와이대학 유학시절 백인부인을 만나 결혼했다. 그러나 오바마를 낳고 몇 년이 지나 이혼을 했으며 하버드대학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를 획득하고 케냐로 돌아갔다.

귀국 후 두 번의 재혼으로 여러 자녀들을 낳았다. 경제학자로서 케냐정부의 요직을 지냈으나 자동차 사고로 1982년 45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금년 7월 26일 아버지의 나라 케냐를 방문했다.
오후 4시에 출발하는 나이로비로 향하는 에티오피아 항공에 올랐다. 탑승 시 검사는 에티오피아와 마찬가지로 철저했다. 200명 이상이 타는 중 비행기다. 2시간 30분 정도 비행하여 오후 6시 30분에 나이로비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밖에는 수십 명의 운전사들이 이름 팻말을 들고 여행객을 맡고 있었다. 내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아 머뭇거리고 있는데 에티오피아의 심바여행사 팻말을 가진 중년남자가 닥아 왔다. 6척이 훨씬 넘는 키에 큰 눈을 부릅뜨고 정면으로 쳐다볼 때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그를 따라 자동차가 있는 곳으로 가니 사파리 지프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무의식으로 자동차 오른쪽 앞자리로 향해서 문을 열려고 했다. 순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왼쪽 운전대를 잡았던 나로서는 영국의 식민지들이 영국처럼 오른쪽에 운전석이 있는 것을 생각지 못했다.

“내가 운전을 할 테니, 당신이 손님 석에 앉으세요,”하고 농담을 건넸더니 그는 웃음으로 “very good”하고 대응했다. 그가 운전하는 자동차에 몸을 담고 공항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나이로비시내에 있는 “사파리파크호텔”로 갔다.

이름만 사파리지 사파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카지노가 있는 리조트호텔이다. 운전수는 호텔데스크로 가 예약을 확인하고 돈을 낸 후 다음날 아침 7시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떠났다. 운전수 겸 안내원은 56세의 주마 빈도(Juma Bindoh)로 무슬림교도다.

호텔에서 저녁식사 후 호텔경내를 걸으니 요란한 음악소리가 들려 가보니 호텔 야외무대에서 아프리카 춤이 한판 벌려지고 있었다. 잠간 구경하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7시부터 나이로비 시내 관광을 하도록 했다. 침대에 들어가지 전에 잠시 묵상을 하면서 주마빈도에 대하여 생각을 했다. 앞으로 만 2일을 그와 단 둘이서 여행을 해야 하니 어떻게 그를 대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았다.

기독교인인 우배는 왜 무슬림교도를 안내원으로 선정해 주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상대의 종교를 존중은 하지만 종교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범을 보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니 기쁘고 마음이 가벼웠다.

6월 8일 (월요일)

이날 오후는 케냐수도 나이로비를 관광하도록 예정되어있다. 나이로비는 1899년에 영국에 의하여 세워진 도시로 1963년 독립 후 수도로 승격되었다. 시 인구는 4백만 명 정도이나 인접도시를 포함한 메트로는 7백만 명이상이다. 나이로비는 아프리카에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가장 유명한 도시 중의 하나다. 100여개의 중요한 외국 기업과 국제기구가 있으며 나이로비증권거래소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것 중의 하나이며 둘째로 오래된 증권거래소다.

아침 7시에 주마 빈도가 호텔에 와 나이로비 시내로 향했다. 다운타운으로 가는 하이왜이는 출근시간 자동차로 혼잡을 이루었다. 역시 모든 차는 일본차 도요다의 일색이다. 빈도는 나에 대하여 알기를 원했으며 어느 나라에서 왔으며 무엇을 하는냐고 물었다.

나는 여행을 할 때 한국에서 온 것처럼 처신할 경우가 많다. 가족과 함께 외국여행을 했을 때다. “왜 한국에서 왔다고 하는냐?”하고 아내와 아이들의 질문을 했다. “한국에서 왔다고 말하면 스스로 행동을 신중히 하게 되어 한국에 대한 인상이 나쁘지 않게 하기위한 것”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이번은 정확하게 말하고자 했다. 뉴욕에서 살고 있는 한국 사람이며 은퇴한 변호사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무슬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혔다. 목사의 직분은 밝히지 않았다. 왜냐하면 목사직분이 무슬림교도인 그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가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시내에 도착하여 우리는 제일먼저 Karen Blixen 국립박물관을 갔으나 자동차를 세울 곳이 없어 들어가지 않았다. 무슬림사원과 국회의사당 구경도 일정에 포함되었지만 그냥 자동차로 스쳐가기만 했다. 미 대사관 폭파기념비 앞도 자동차로 지나쳤다.

빈도는 시내를 한 바퀴 돌다가 높은 언덕위에 차를 세운다. 이곳은 우후루(Uhuru)시립공원으로 나이로비 다운타운이 잘 보이는 곳이다. 우후루는 킬리만자로의 제일 높은 봉우리 이름과 같다. 시내를 배경으로 몇 장의 사진을 찍은 후 나이로비관광은 중단하고 암보셀리(Amboseli)국립공원으로 방향을 돌렸다. 나이로비 관광은 수박 겉핥기보다도 더한 엉터리 관광이 되어 버렸다.

암보셀리국립공원은 탄자니아 킬리만자로국립공원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케냐의 국립공원이다. 이곳에서 2일간 체류하면서 사파리와 마사이족 마을을 방문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나이로비에서 암보셀리까지는 143마일이지만 고속도로가 단선이라 각종의 화물차와 다른 차량들이 많아 4시간 이상이 걸렸다. 먼 곳에 산이 보이지만 몇 시간을 가도 들판의 연속에 끝이 보이지 않는 옥수수 밭이 사방에 있다. 소들이 때를 지어 하이왜이를 건너갈 때는 자동차를 세우고 기다려야했다.

이 넓은 광야를 해치고 수도 나이로비와 제2의 도시 몸바사(Mombasa)간 490km 구간에 새 철도를 10억불에 중국인들이 건설하고 있다. 영어나 케냐를 포함한 여려 아프리카에서 사용하고 있는 스와힐리(Swahili)언어도 없다.

한자로 중국건설회사의 이름만 대문짝 같이 쓰여 있다. 에티오피아에서도 마찬가지로 중국인이 공사하는 곳은 한자만 커다랗게 쓰여 있다.
자동차에 연로도 넣고 변소도 사용할 겸 주유소에 들렸다. 이곳에는 잡화상도 있는데 이 상점 앞에 남자들이 몇 명 서 있다. 남자들이 할 일 없이 여기저기 모여 있는 것은 아프리카의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들이 나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한국에서 왔다고 말했더니 반갑게 “South or North?”하고 묻는 것을 보니 한국을 아는 사람들이다. 아프리카 사람들도 다른 어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한국 사람을 보면 중국 사람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은 수가 적지만 중국인들은 아프리카 어디에서나 많기 때문이다.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 만난 한국대사관의 사공영사의 말이 생각났다. “에티오피아에는 한국인은 수백 명에 불과하지만 중국인은 10만 명이상이다. 중국대사관 자신도 중국인의 숫자를 파악하기 힘들 만큼 많은 사람들이 본토에서 들락거린다고 한다.”

3시간의 포장된 고속도로, 1시간의 비포장지대를 거치면서 빈도와 나는 친근하게 되었다. 내가 농담을 하면 그는 소리내어 웃는다. 운전이 너무 서행이여서 “젊은 사람이 노인처럼 운전하는가. 뉴욕 맨하탄 운전사처럼 하라”고 하여 그를 웃기게도 했다.

어느 일요일 아침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데 아내가 “당신 노인처럼 운전하네요,”하고 말했다. 나는 “70이 넘었는데 노인이 아닌가? 젊은 사람처럼 운전해 볼가요?”하고는 속도를 내었다. 불안한지 아내는 “아니에요, 노인 운전이 좋아요”했던 일이 있다.

빈도는 두 아들을 가진 가장이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해양엔지니어가 되기를 원했다. 부모는 여유가 없어 대학에 들어가는 학비도움을 삼촌에게 청했다. 거절당했다. 그래서 자동차 정비를 배우기 위해 기술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하다가 육군에 들어가 5년 동안 복무했다.

그는 정비가 싫어서 대학에 들어가 언어학을 전공하고 관광업에 뛰어든 지 20년이 넘었다. 그는 자기나라 언어 외에, 영어, 불어, 독일어에 능통하여 이들을 위하여 관광안내를 하고 있다. 두 아들이 있으며 24세의 큰 아들이 대학을 졸업했는데도 직업이 없다고 했다. 나는 현제 무슬림 극단자들이 직업이 없는 아이들을 태로단으로 유인하고 있는 무슬림극단주의 ISIS의 실상을 설명했다. 그리고 아들의 직장을 구하도록 노력하라고 했더니 감사하다고 했다.
나이로비에서 출발하여 4시간 후에야 암보셀리국립공원 경내로 들어왔다. 공원에 들어와 10분정도 지나서 우리가 머물 숙박지인 Amboseli Serena Safari Lodge에 도착했다. 40개 방갈로가 있는 호텔은 케냐와 탄자니아 지역에 널리 있는 체인호텔의 하나로 이 호텔들은 인도케냐인 들이 운영하고 있다.

아프리카에는 인도인의 후예들이 3백만 이상이 있다. 특히 남아프리카에 가장 많으며 켄냐에 30만 명 이상이 있다. 이들은 19세기 영국의 노동자들로 왔으며 그중 많은 사람들이 켄냐와 우간다로 연결된 철도를 건설하기위해 온 노동자들의 후예들이다. 대부분이 노예처럼 혹사했지만 이들은 경제적으로 튼튼한 기반을 쌓아 그 나라 국가경제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빈도는 인도인들이 현지인들을 고용하고 사업을 훌륭하게 경영하기 때문에 아프리카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했다.

반면 중국 업체들은 중국에서 노동자를 들여와 고용하며 현지인들에게 고용의 기회를 주지 않고 있어 중국인들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다고 말했다. 노동자들이 영어를 몰라 고함을 지르며 현지인들과 충돌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중국인들은 고용계약이 끝나면 금덩어리등 귀금속을 사가지고 본국으로 간다.

아프리카 현지 한국선교사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한국인들은 첫째 얼마 되지 않은 숫자에 대부분 선교사와 코이카, 엔지오 등 대민봉사자들이 많고 삼성, 현대, LG 등 대기업에 대한 이미지도 나쁘지 않아 좋은 평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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