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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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최우등 대통령 제16대 Abraham Lincoln (5)

2015-09-0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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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ncoln 의 대통령 당선과 미연맹국 (CSA) 창건

<조태환>

1860년 대통령선거 때 각당의 대통령후보 공천과정을 보면 당시의 정치양상이 Lincoln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민주당은 당이 지향하는 방향이 분명치 않았음이 노골적으로 노출되었고 후보공천과정에서 남북 두동강이로 분열되어 버렸다. 또 남부의 친노예주들도 후보를 두 명이나 따로 내놓을 만큼 분열되어 있었다. Lincoln의 입장에서 보면 고소원이나 감불청이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God blessed America, U.S.A. was saved!

1860년 11월의 선거결과 Lincoln 은 남부 노예주들 에서는 모두 패배하였으나 비노예주 18곳에서 모두 승리하였고 Breckinridge 는 노예주 11곳에서 승리하였으며 Douglas 는 미조리 주와 뉴저지 반쪽을 얻었을 뿐이고 Bell 은 3개 주에서만 승리하였다.


선거인단 득표수로는 Lincoln 이 180표를 얻어 타후보들의 득표 합계 123표 보다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실제 유권자 투표수로는 39%를 얻는데 그쳐 그때까지의 대통령 당선자들 중에서 가장 낮은 득표율이었다고 한다. 낙선된 후보들의 득표수를 통산하면 Lincoln 이 득표한 187만표 보다 백만표가 더 많았지만 Lincoln 은 선거인단 수가 많은 주들에서 승리 하였던 까닭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드디어 남부주들이 용납할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남부 주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필요 불가결 하다고 생각되는 노예제도의 존속을 위해서는 “전제국가 미합중국” 에서 탈퇴하여 독립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으며 필요하다면 연합하여 무기로 자신들의 생존권을 수호할 수밖에 없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전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들처럼 중앙정부가 도들의 경계선을 그어놓고 도지사와 도정부는 중앙정부가 허락해 준 권한만 행사할 수 있는 제도를 가진 나라인 한국에서 온 우리동포들은 미국의 중앙정부와 주정부들 간의 권한분권 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기가 쉬웁다.

“미합중국”은 국명 그대로 주정부 대표들이 모여서 연방헌법을 쓴후 연방정부를 만들었고 연방정부는 주정부들이 “허용한” 권한만 행사하도록 “허용”되었다. 따라서 헌법에 명시적으로 연방정부에 “양도”되지 않은 모든 권한은 주정부들이 계속 “유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나라들에서는 독립국가 만이 가질수 있는 주권 (sovereignty) 을 많은 미국사람 들은 주정부도 가져야 한다고 “착각”하고 있어서 연방의원 총선거 때나 대통령 선거 때마다 주권 (state rights) 는 매우 중요한 정치논쟁의 주제가 된다.

1860년의 대통령 선거때에도 주권 (state rights/ sovereignty) 문제는 중요한 쟁점이 되었으며 만일 공화당이 집권하여 미국이 (연방정부가) 노예제도를 철폐라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위헌적인 남부주들의 주권의 침해이며 생존권의 박탈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영국의 전제주의 폭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독립혁명을 일으 켰던 미국사람들은, 특히 남부사람들은, 선거에 졌다는 이유만으로 무장 저항도 한번없이 주권을 순순하게 내어 줄수는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1860년 대통령 선거때까지는 어느 주가 미합중국을 탈퇴한 사례도 없었지만 탈퇴에 관한 헌법상의 규정도 없었다. 그래서 현직 부통령이었던 Breckinridge 후보는 대통령선거 운동 중에 주는 미합중국에서 탈퇴할 권리가 있다는 한심한 소리를 하고 다녔으며 현직 대통령 Buchanan 은 Lincoln 의 당선이 확정 되자마자 일부의 남부주들이 미합중국을 탈퇴하기 시작하였으나 “연방탈퇴는 위헌이지만 연방정부가 탈퇴를 막을 방도가 없다” 라고 뒷짐지고 관망하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는 문제가 더 악화되기전에 1861년 3월 3일에 자기 임기가 끝나 주었으면 하고 있었었다. 만일 Lincoln 이 Buchanan 과 같은 최열등 대통령이 었다면 미합중국은 계속되는 주들의 탈퇴로 소멸되어 버렸을 것이다.
1860년 11월의 선거 에서 Lincoln 이 대통령에 당선 되자마자 한달후인 12월 20일에 South Carolina 가 독립을 선언하며 미합중국을 선두로 탈퇴하고 아래의 여섯개의 주들이 Lincoln 이 1861년 3월 4일에 대통령에 취임도 하기전에 미합중국을 탈퇴하여 버렸다.


Mississippi (1/9/61), Florida (1/10/61), Alabama (1/11/61), Georgia (1/19/61), Louisiana (1/26/61), Texas (2/1/61) 등이었다. . 이들 탈퇴한 주들은 1861년 2월 5일에 Virginia 주의 Richmond 에 모여서 새 독립국인 미연맹국 The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CSA) 의 새 헌법을 작성하고 2월18일에 Jefferson Davis 를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그후에 탈퇴한 주들은 Virginia (4/17/61), Arkansas (5/6/61), Tennessee (5/7/61), North Carolina (5/20/61)등이었다.
결과적으로 남부쪽의북방경계선은Texas, Arkansas, Tennessee, Virginia 등이 되었으며 북부쪽의 경계주들은 Missouri, Kentucky, Maryland, Delaware 등이 되었고 West Virginia 는 1861년에 Virginia 에서분리 되었다가 1863년에 주로 승격되었다.

Jefferson Davis 는 1861년 11월 6일에 6년 임기의 정식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는 노예 백여명을 거느린 농장주이었으며 Pierce 대통령때 전쟁부 장관을했었고 그후 미시시피 주의 연방하원의원, 연방상원의원 등을 하다가 CSA 의 대통령이 되었는데 별로 탁월한 정치 지도자가 아니었다고 한다.

역사가들은 다른 사람이 CSA 의 대통령이 되었더라도 남북전쟁의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보지만 남북전쟁 시작 때부터 CSA 가 소멸 되었을때까지 대통령을 한 Davis 는 Lincoln 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2류급 지도자이었다.

Lincoln 이 융통성과 타협에 능란 했던것에 비하여 Davis 는 경직한 사람이었고 권한을 위임하지않고 작은일까지 간섭 하였으며 군의 인사에도 친소관계를 중시하였으며 West Point 출신으로 군사 경험도 있는 사람이기는 하였으나 전쟁도 대통령이 직접 지휘하려들곤 하였다고 한다. 그의 이와같은 무능은 미합중국의 통일존속을 위해서 천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남부는 “사활을 건 전쟁”이었음으로 그나마 Davis 밑에서 단결하여 북부와 싸우게 되었다. Davis 는 숭앙을 받은 지도자가 아니라 전쟁 중 부득이한 단결의 상징이었다.

훗날 얘기를 조금 미리 댕겨서 얘기해 보자면 그는 남북전쟁이 끝날무렵 Cuba로 가서 CSA 망명정부를 만들어볼 계획까지 하였으나 찬동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던듯하고 1866년에 북군에 체포되어 재판없이 2년여 군대영창에서 지냈다.

Lincoln 을 승계한 Andrew Johnson 대통령이 Davis 를 반역죄로 기소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건강이 좋지 않아졌던 Davis 를 기소하는데 국무회의조차 반대 하였다고 하며 반역죄 재판에서 유죄판결이 나올런지도 분명치 않았다고 한다.

결국 전쟁이 끝나고 3년 후인 1868년에 Johnson 대통령은 Davis 를 사면해 주었다. 남부와의 화해를 위한 제스처이기도 했었다. Davis 는 지금까지 남북전쟁 때의 남부군 명장들 Robert Lee, Stonewall Jackson 장군들과 함께 남부단결의 상징으로 남아 있어서 남부주 여러군데에 지명, 도로명, 동상들이 있다고 한다.

2015년에도 그의 동상 철거문제가 University of Texas 에서 큰 논쟁거리가 되었는데 그 동상은 이미 몇 차례 훼손되어 있었다. 1978년에 미국국회는 Davis 의 미국 시민권을 회복시키는 법을 제정하였는데 법안에 서명한 당시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남북 불화를 종식시키는 법안이라고 얘기하면서 서명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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