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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진의 아프리카 여행기 ③베타이스라엘

2015-08-2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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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티오피아 유대인 ‘베타이스라엘’ 이라 부르는 흑인들

권태진의 아프리카 여행기 ③베타이스라엘

곤다르가 에티오피아 수도일 때 성곽의 사진.

시바여왕과 솔로몬 사이 태어난 아들 메네릭크 1세가 최초
베타이스라엘 왕국 황금기는 858~1270년
1980년 이후 10만명 이상 이스라엘 이주 에티오피아엔 거의 없어
옛 유대인 마을 건너편 남편 없는 여인들 위한 직업훈련소 자리

▲베타이스라엘(Beta Israel)
오후 1시가지나 식당에서 나와 유대인 마을 베타 이스라엘을 방문하러 떠났다. 유대인 마을이라지만 지금은 유대인들은 다 떠나고 에티오피아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다. 에티오피아 유대인은 베타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흑인들이다. “이스라엘의 집” 또는 “이스라엘 커뮤니티”란 말이다.

시바여왕과 솔로몬 사이에서 난 아들 메네릭크 1세가 최초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기원전 586년 바벨론 포로시절 이집트를 통하여 에티오피아까지 피난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타이스라엘 왕국이 동북부에 세워졌으며 황금기는 858년에서 1270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1270년 크리스천 솔로몬 왕국이 세워지면서 유대인의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한때 백만 명에 육박했던 유대인들이 19세기 중반에는 30여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1970년 중반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종교박해로 유대인들이 고난을 당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로 이민을 가기 시작되었다.

이스라엘 국가가 설립된 1948년과 1951년 사이에 불과 10명의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이민 온 이래 1979년까지 불과 수백 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980년부터 2009년 까지 10만 명 이상이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에티오피아에는 거의 유대인이 없어졌다. 현재 이스라엘에 121,000명의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이 있다. 이중 81,000명은 에티오피아에서 태어난 사람이며 나머지는 2세들이다. 소련 출신 유대인은 백인이며 또 교육도 잘 받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동화되는데 문제가 적다. 그러나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은 흑인이며 교육도 받지 못한 농장지대의 사람들이다. 이스라엘 사회에 동화되지 못하고 있다.

2009년 조사에 의하면 이들 이민자들의 남자 93% 여자 85%가 에티오피아 출신과 결혼하고 있다. 한 조사에 의하면 57%의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의 딸이 에티오피아 출신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며 39%는 아들이 에티오피아 출신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베타이스라엘 유대인들은 에티오피아 동북부지방의 500여개 마을에 흩어져 살았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곤다르시 부근에 있는 암하라(Amhara)지방이다. 우리가 마을에 도착하니 몇 명의 어린아이들과 부녀자들이 수예품을 팔려고 우리에게 접근해왔다. 이들은 유대인이 남겨놓고 떠난 집과 농토를 정부로부터 받아 살고있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아직도 유대인들이 살았던 집 앞 벽에는 다윗의 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 중에서 유대인이 하였던 공예기술을 연마하여 물건을 만들에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팔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어려운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였다. 흙벽으로 된 집은 움막집에 불과하다.

부엌과 화장실은 집밖에 설치되어 있다.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는 있었으나 초급학교부터는 멀리 떨어진 정부의 학교로 아이들을 보냈다. 그들은 공예품을 만들어 팔기도 했지만 생활수단은 농사였다. 뒷마을에 광대하게 펼쳐진 들판이 그들의 농토였다.

옛 유대인 마을 건너편에 넓게 자리 잡은 직업훈련소(Ploughshare Women Crafts Training Center)로 갔다. 남편 없이 아이들과 사는 부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곳이다. 유대인들이 남긴 공예품, 그릇, 편물 등 각종의 기술을 가르쳐 자기 마을로 보내 제품을 만들어 팔아서 생활하도록 도와주는 곳이다. 넓은 땅에 기숙사도 갖추어져 있다. 각종의 기술을 가르치고 있었으며 가축도 기르고 있다.

오랫동안 매니저로 일 해온 50대 Abera 여인은 지난 20여 년간 1,100명 이상의 부인들을 훈련시켰다고 했다. 만든 물건을 팔고 이집트 주미대사관을 포함한 몇몇 기관이 재정적 후원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의 숙소로 안내하여 커피를 마시면서 왜 시집가지 않느냐고 농담을 했더니 나 같은 사람 하나 소개해달라고 응수한다. 나는 너무 늙었다고 했더니 그래도 좋다고 하여 한바탕 웃었다. 이 직업훈련소를 도울 수 있는 길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운 생각을 하면서 그곳을 떠났다. (사진, 직업훈련소)


▲6월 5일 금요일
곤다르에서 하루를 보내는 동안 정교회 안에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호텔에서 걸어서 2-5분 거리에 두 개의 정교회가 있다. 아침 5시30분쯤에 호텔 옆에 있는 트리니티 교회 뜰에 들어갔다. 뜰에는 몇 사람만 보였다. 조금 지나니 흰 가운을 입은 성도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맨발로 오는 사람도 있고 대부분이 샌들을 신고 있다. 교회에 들어오면서 하는 행동은 각양각색이다.

교회 경내로 직접 들어오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교회 경내에 들어오기 전에 입구에서 머리를 땅에 대고 절을 하거나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다. 나무나 벽에 기대어 아직도 어두워 플래시를 켜고 성경을 보는 사람들도 있다. 교회 뜰로 들어온 사람들도 교회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교회건물 밖을 돌면서 머리를 돌계단이나 땅에 대고 키스를 하거나 기도를 하고, 허리를 굽히고 여러 차례 절을 하는 등 여러 형태다.

나는 뜰 안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가 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향하여 무릎을 꿇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습관이 있다. 아프리카를 위한 묵상은 여행 중 몇 차례 이미 했다. 금년은 남북분단 70년이라 금년 초부터 남북에 대한 기도를 해왔다. 집 떠난 지 며칠이 되니 아내에 대한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후 교회 안쪽으로 발을 딛기 시작할 때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 저지를 했다. 6시가 되어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다른 사람처럼 흰옷도 입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 같은 외부인들은 교회 안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러나 특별한 요청이 있어 허가를 받으면 들어 갈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아침 공기도 마실 겸 거리를 걷기로 하고 교회 밖으로 나왔다. 교회로 들어오는 길모퉁이에는 10여명의 걸인들이 앉아 있었다. 모두가 여자들로 머리를 땅에 대고 손만 내 놓는 여자, 얼굴을 가리고 눈만 내 놓고 손만 벌리고 있는 여자, 얼굴을 내 놓고 나를 쳐다보면서 손을 내미는 여자도 있다. 교회 앞과 교회 부근에 걸인들이 구걸하고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화 50전에 해당되는 현지 돈 10버르(Birr)짜리 30개를 미래 준비했었다. 준비한 지폐 한 장씩을 주고 다른 교회 쪽으로 향했다. 새벽기도 가는 교인들의 실태를 보기 위하여다. 흰옷 차림의 교인들이 길을 메우고 있었지만 자선을 바라며 길거리에 앉아있는 걸인도 적지 않았다. 이들에게 한 장 씩 주기 시작하니 순식간에 동이 났다.

호텔로 돌아와 다음 여행지 악섬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곤다르에서 비행기로 1시간 걸리는 가까운 곳에 있는 곳이다. 이곳은 에티오피아의 성지 중 성지다. 가이드 시세이가 호텔로 와 7시에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으로 가는 길목은 양쪽이 비교적 비옥한 농장지대다. 25분정도 지나 도착한 곤다르 공항은 아주 작은 공항으로 경비행기만 이착륙할 수 있다. 가이드와 공항건물 밖에서 악수로 작별했다. 비행장인데 비행기는 한 대도 없다. 다른 곳에서 와야 그 비행기로 출발하는 것 같다. 공항 대기실에 승객들도 얼마 없다. 출발시간까지는 아직 2시간 가까이 남아있다.

▲비행기를 놓치다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이메일을 체크하고, 여행 중 전화기로 찍은 사진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기위해 게이트 밖으로 나가기 시작하자 나도 그들을 따라 비행기에 올랐다. 여승무원은 악섬으로 가는 비행기는 20분 전에 떠났다고 했다. 놀란 나는 다음 여행스케줄에 큰 차질이 올 것 같은 생각으로 불안했다.

큰 실수였다. 사람이 얼마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방송이나 마이크로 하지 않고 게이트 앞에서 육성으로 비행기 보딩을 알렸기 때문에 전화기에 열중하다가 듣지를 못했다. 그곳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두 악섬으로 가는 것으로 착각하고 편안하게 딴전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달을 여행해야 하는데 며칠도 되지 않아 이런 실수를 저질렀다.

공항사무실로 다시 가서 다음 비행기를 알아보았다. 다행히 오후 4시30분에 비행기가 있었다. 75달러 벌금을 내고 예약을 한 후 공항직원의 전화를 빌려 아디스아바바의 우베 사장에게 비행기를 타지 못한 것을 알렸다.

아침 7시에 공항에 왔으니 오후 4시까지 9시간을 공항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했다. 공항 대기실 내에 자리를 만들고 커피를 파는 곳이 있다. 젊은 여자가 고객이 보는 앞에서 커피 씨를 불에 볶은 후 그릇에 넣고 손으로 갈기 시작한다. 커피가루를 만들어 커피 잔을 만든다.

커피의 최초의 원산지가 에티오피아라고 한다. 에티오피아 커피는 너무 진하여 마시지 않았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많아 한잔 마셔보기로 했다. 한잔에 10버르(미화50전)이었지만 20버르를 주고 잔돈은 받지 않았다. 에티오피아에는 음식 먹고 주는 팁 제도가 없어 주지 않아도 결례는 아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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