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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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최우등 대통령’ 제16대 Abraham Lincoln (3)

2015-08-2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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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아들 Robert T. Lincoln

<조태환>

Robert Lincoln의 묘비에는 아래와 같은 명문이 적혀 있다고 한다.

“ … was a personage, made his own history, independently of his great father, and should have his own place ‘in the Sun.’” 로버트 링컨( Robert Lincoln) 은 링컨의 네아들중 유일하게 여든세 살까지 생존하고 변호사, 전쟁부장관, 주영 미국공사, Pullman 객차회사 사장, 회장등을 역임하고 1884년 부터 1912년 사이에 공화당에서 여러 차례 부통령, 대통령 후보로까지 거론되었던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때마다 공천을 받을 선거운동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만일 공천이 되더라도 수락하지 않겠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만하면 링컨의 아들로써 큰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고 보통사람들은 엄두도 못낼만큼 “성공하고 출세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훌륭한 아버지를 둔 사람들은 ‘팔자 좋은 컴플렉스’가 있는 수가 종종 있는 듯한데 로버트 도 이런 컴플렉스로 시달렸던 사람이었던 듯하다. 그는 평생 아버지의 그늘 밑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느꼈던 듯하다.

평생 로버트라기 보다는 ‘링컨의 아들!’이라고 알려졌던 그는 물론 아버지의 후광을 많이 입었었겠지만 자신이 성공하드라도 어디까지가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어졌고 어디서부터 아버지의 후광으로 이루어진 것인지에 대한 혼돈이그를 항상 따라 다녔다.

아니 그가 죽을 때까지 이런 컴플렉스 로 마음속으로 번민해 온것을 잘알고 있던 그의 미망인 Mary Eunice Harlan Lincoln (Iowa 주 Harlan 연방상원의원의 딸)이 이번글의 서두에 나온것과 같은 명문을 Robert 의 묘비에 적어넣고 “independently” 라는 단어에는 underline 을 다섯 번이나 쳐놓았다고 한다.

이 ‘아버지의 그늘’이라는 플렉스 는 그가 살아 있든동안 Robert 에게 사실상 심각했던 것이었던지 그의 사망후 미망인 Mary의 주장으로 유해를 참전육군대위와 전쟁부장관 으로써 매장특권이 있는 버지니아 주의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시켰다.

Jason Emerson이 쓴 Robert의 자서전 책명은 “Giant in the Shadows: The Life of Robert T. Lincoln” 이다. 뒤에 숨겨진 의미가 깊은 일화들일 뿐만 아니라 인간 로버트 링컨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얘기들이다.

“아버지는 늘상 법원에 변호하러 나가셨거나 시간이 나면 정치연설을 하러 다니셨다”라고 회상한 Robert 는 주로 어머니의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났으며 Lincoln 이 대통령이 된후에는 10분이상 같이 얘기해 보기가 힘들었다 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Lincoln이 자기 아버지 Thomas와의 관계가 불편 했었던 것처럼 Robert도 Lincoln과의 관계가 따뜻하고 친근하지는 못하였던듯 하다. 1865년 4월 14일에 뒷머리에 총격을 받은 링컨은 부인과 로버트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 다음날 아침에 운명하였다.


아버지가 암살된 후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을 데리고 시카고로 가서 법과대학에 다녔던 로버트는 결혼 후 어머니를 잠시 모시고 살았으나 고부관계가 순탄치 못해 어머니와 따로 살게 되었는데 어머니의 정신 분열증에서 생겨난 것으로 짐작되는 문제들 때문에 모자간의 관계가 악화되어 어머니 사망 조금전까지 좋은 관계가 회복되지 못하였다 한다.

그는 고등학교때에 공부에 조금 게을렀던지 하버드 대학 입학시험과목 16개 중에서 15과목에 낙제점을 받았다고 한다. Phillips Exeter Academy에서 일년 재수한 후 그 다음해에 하버드 대학에 들어갔는데 졸업할때에는 100명 중 30등쯤으로 장족의 발전을 하였었다.

친구들과 교수들에게 “겸손하고 신의있는” 사람이란 인상을주었다는 Robert 는 학자형인 사람이 아니라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고 학생클럽에 들어가 음주, 흡연 등 젊은사람들이 하는 일들을 친구들과 어울려서 하던 성격으로 정치를 했어도 성공했을 자질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 법과대학에 다니다가 아버지가 북군 총사령관에게 내린 특명으로 군대에 갔었다.

그는 군복무를 마친 후 University of Chicago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었다. 변호사로써 성공을 했던 로버트는 아버지와는 달리 선거직으로는 추후 시카고 시의 일부가된 South Chicago의 시장격인 Town Supervisor를 해본 것이 전부였다. 그의 변호사업은 당시 급성장하던 철도회사들을 고객으로 많이 가지고 있는 등 아주 성공적이었다.

미국에서 제일 큰 철도 객차 제조회사인 Pullman Palace Car Co. 도 1897년부터 그의 고객 회사가 되었는데 1901년에 회사의 창립자이자 사장이었던 George Pullman 이 사망하자 로버트 는 사장 대행이 되었고 1906년에는 정식 사장이 되었다. 1911년에 건강상의 이유로 사장직은 사임하고 회장으로서 1922년까지 일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돈을 많이 벌어 몇 군데 집도 가지고 있었다.

로버트의 일생에는 우연이라고 보기 어려운 역사적인 사건들이 여러번 있었다. 첫번째로 그가 아직 군대에 있을때에 저지시티에서기차를 타려고 승강장에 서 있다가 실수로 한발이 객차와 승강장 사이의 좁은 공간으로 빠졌다.

얼른 빠져나오지 않으면 생명이 위급해진 형편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그의 외투를 잡아 그를 끌어 올려서 구출해 주었다. 그 생명의 은인의 이름이 Edwin Booth이었다. Edwin은 당시 유명한 연극배우로써 로버트의 감사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랜트 장군의 부관실에서도 감사장을 보냈었다고 한다. 어떤 운명의 장난이었는지는 모르지만 Edwin의 친동생 John Wilkes Boot 가 그 몇 년 후 링컨을 암살하였다.

두 번째로 로버트는 1865년 4월14일 밤에 Washington의 Ford 극장에서 링컨이 저격을 받았을 적에는 백악관에 있었으나 총격 후 Peterson House에 안치된 링컨이 운명 할 때까지 어머니와 같이 링컨을 임종하였다.

세 번째는 로버트 가 전쟁부장관으로서수행해 온 제20대 James A. Garfield 대통령이 취임 후 4개월이 되던 1881년 7월 2일에 워싱턴의 기차역에서 Charles J. Guiteau 의 저격을 받았을때 그현장에 있었다. Guiteau 는 Garfield 대통령을 선거때 지지햇던 사람이 었는데 기대했던 외교관직에 임명이 되지않아 앙심을 품고 대통령을 저격하였는데 Garfield 대통령은 11주후인 그해 9월 19일에 사망하였다.

네번째로 제25대 William McKinley 대통령이 1901년 9월6일에 벞 에서 무정부주의자 Leon Czolgosz 의 저격을 받았을 때에도 로버트는 현장에 있었다. McKinley 대통령은 8일 후인 9월14일에 사망하였다. 로버트는 결국 그때까지 있었던 세 미국대통령의 암살사건의 목격자가 되었었다.

로버트는 “자기가 대통령의 운명에 나쁜 운수를 가져다 주는 사람” 이라는 거의 미신적인 확신이 생겨서 그때부터는 대통령들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로버트의 공직생활 중에 한 가지 특기해야 할 일이 있다. 링컨 대통령은 “Emancipator” (노예해방자) 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흑인들의 인권보장과 노예해방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칸 인디언에 대해서는 아무일도 하지 않았다.

링컨은 아메리칸 인디언에 대해서는 전 대통령들의 정책을 계속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임기 중에 미국 원주민 섬멸정책이 더 가속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로버트는 아버지의 과오를 대속이라도 하는 것처럼 4년 동안의 전쟁부장관 재임시에 백인들이 미국원주민 영토를 침범하는것을 금지하도록 하는 입법을 주장하였었다.

로버트는 1926년에 워싱턴에 있는 Lincoln Memorial 제막식에 가족으로써 참여한 이후에는 공식 석상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로버트는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었으나 아들 Abraham Lincoln, II 가 16세에 사망하여서 Lincoln가는 절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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