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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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원의 서양미술 산책 (4) 렘브란트(Rembrandt)

2015-08-0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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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와 종교적 색채 짙은 수많은 걸작 남겨

강용원의 서양미술 산책 (4) 렘브란트(Rembrandt)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9)

강용원의 서양미술 산책 (4) 렘브란트(Rembrandt)

렘브란트 자화상(1659)

33살 때 암스테르담 타운하우스 건물 구입 작품 활동
17세기 이곳을 렘브란트 박물관 지정
부인 두 명과 자식들 모두 비명에 보내는 고독한 말년
죽기 직전 2년간 그린 ‘돌아온 탕자’대작 중 하나

렘브란트(Rembrandt)는 1506년 7월15일 라이던 (Leiden)에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는 방앗간 주인이었고 그의 부모는 비교적 중산층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렘브란트의 교육에 신경을 많이 써 교육을 잘 시켰다. 렘브란트는 라틴스쿨을 시작으로 14살 때 University of Leiden에 등록을 한다. 그는 학교생활에 흥미를 잃어 학교를 떠나 그곳 로컬 매스터인 스봐넨 버크(Swanenburch)에게 미술을 배우며, 암스테르담에 있는 피터 라스트만(Pieter Lastman)에게는 미술에 대한 역사를 배운다.

6개월 후 많은 것을 마스터한 다음 렘브란트는 라이던으로 돌아온다. 그는 22세 밖에 안 되었을 때 이미 첫 번째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하며 그중 유명한 아티스트 게릿 도우(Gerrit Dou)도 그의 학생이었다. 렘브란트는 1631년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며 성공적인 아트딜러의 사촌, 싸스키아(Saskia)와 결혼을 한다. 그는 이 결혼으로 인해, 부자 후원자들을 많이 알게 되며 이들의 자화상을 그리도록 커미션을 주는 등 그녀와의 결혼은 그의 커리어에 많은 도움을 준다.

이 기간 동안 대표적인 작품으로 Nicolaes Ruts의 초상 화 그리고 렘브란트의 신화와 종교적인 작품들은 많은 인기 가 있었으며 그는The Blinding of Samson 과 같은 많은 매스터피스 들을 남기었다. 그는 선생으로서의 유명세 때문에 그의 스튜디오는 한상만원이었다. 렘브란트는 1639년 33살 때 지금현재 렘브란트 박물관인 암스테르담에 있는 타운하우스 건물(사진) 을 구입하며 그는 이곳에서 많은 작품들을 그린다.


이곳은 또한 그의 아내와 세 자녀들이 죽은 그의 개인적인 비극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집에서 렘브란트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1660년 쫓겨나게 된다. 현재 있는 건물 위층과 지붕은 이집을 구입한 새 주인 이 증축한 것이며 그후 1911년 Dutch Movement가 17세기 Dutch 건축물인 타운하우스를 내셔널 아티스트의 성지로 보존하기 위하여 이곳을 렘브란트 뮤지엄으로 지정하게 된다.

그의 성공적인 아트경력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Family Life는 불행하였다. 1635년과 1641년 사이 그의 아내 싸스키아는 4자녀를 낳으나 다 죽고 그중 막내아들, 타이터스(Titus) 한명만이 살아남으나 일 년 후 1642년 그녀 자신도 30세의 젊은 나이에 죽는다. 그녀가 죽은 후 Hendrickje Stoffels은 1649년 그의 가정부로 일하며 마침내 렘브란트의 합법적인 아내가 되었고, 그녀는 그의 많은 그림들에서 모델로 등장한다.

렘브란트는 화가, 아트선생 그리고 아트딜러 등을 하여 경제적으로 돈을 잘 벌었음에도 높은 취향과 낭비 때문에 1656년 파산하게 된다. 그는 집을 파는 것 외에 경매에 고대 조각품, Flemish와 이탈리안 르네상스 페인팅, 동양화, 그 당시 Dutch 그림들, 그리고 각종 무기들을 내 놓았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이와 같은 악조건들도 그의 예술에는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였으며 오히려 그의 예술에 대한 인기는 상승하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작품들에는 The Jewish Bride , The Syndics of the Cloth Guild, Bathsheba, Jacob Blessing the Sons of Joseph 그리고 그의 자화상 등이 있다.

하지만 그의 사랑하는 재혼한 나이어린 아내 Hendrickje 마저 1663년 죽고 마지막 남은 그의 외아들, 타이터스도 1668년 27세의 젊은 나이에 죽음으로써 그의 Personal Life는 슬픔의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되었고 11개월 후, 1669년 10월4일 아티스트 자신도 암스테르담에서 마지막 생을 마감하게 된다.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돌아온 탕자는 렘브란트가 1669년, 그가 죽기 2년내에 완성한, 성경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스토리를 유화로 그린 대작 중의 하나이다. 렘브란트는 이 성경 비유에 감명 받아 1636년 Etching을 시작으로 10여년에 걸쳐 이를 소재로 한 여러 점의 드로잉, 유화 그리고 Etching 등의 작품들을 내놓는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에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등장하나 이들은 Etching 등 그의 초창기 작품들에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Identity는 논쟁이 되어왔다.


어깨 위의 손, 부성.모성 동시에 암시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그림 맨 왼쪽 위에 흐릿한 그림은 그의 어머니로 추정되며, 모자를 쓴, 부자로 보이는 앉아있는 사람은 재산관리자나 세무사원으로 추정됨. 가운데 뒤에 서있는 사람은 하인이며 오른쪽 앞에 서있는 사람은 돌아온 탕자의 형.

이 그림에서 작은아들은 집을 떠나있는 동안 방탕한 생활로 미리 유산 받은 재산을 모두 탕진 하고 망해서 돼지지기를 하며 고생하다 그해 기근으로 배고픔과 고생으로 머리도 다 빠지고 너덜너덜한 신발을 신고 거지꼴을 하고 돌아온다. 그는 자기 집에서 종들이 자기보다 나은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참회를 하며 자기를 받아 주도록 용서를 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관대하고 반갑게 맞이한다.

이 그림에서 작은 아들의 어깨 위에 올려놓은 아버지의 손은 아버지와 엄마의 손을 동시에 암시한다. 그의 아들 어깨위에 올려놓은 왼손은 근육이 많고 남성적인 아버지의 손을 상징하며 그의 오른손은 부드럽고 여성적인 모성으로 그를 감싼다. 심판을 하려고 작심한 듯 팔짱을 낀 오른쪽에 서있는 사람은 돌아온 탕자의 형이며 죄를 지은 그의 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깊은 동정심과 슬픈 감정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그간 저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 일해 왔으며 아버지의 명령에 불복종 한 적이 없으나 아버지는 저에게 친구들과 파티를 하도록 염소 한 마리도 잡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동생은 매춘부와 방탕하게 노느라 아버지가 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위해서는 살찐 송아지를 잡아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말하기를 “너의 동생은 죽었다 살아왔고 잃어버렸다 지금 찾았으므로 이를 축하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하고 적절한 것이니라” 고 대답한다.

제공: 강용원 <음악과 미술의 전당, 아라베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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