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주 서남부의 아즈텍부족, 조지아 주의 Creek 부족, 텍사스 주의 Comanche 부족, 남미의 잉카제국 등 콜럼부스가 도착하기 이전의 북남미주에 이미 노예제도가 성행하고 있었으며 포르투갈 통치하의 브라질에도 노예들을 썼다.
포르투갈에는 1,444년에 아프리카 노예시장이 개설되었으며 1,519년 Spanish Conquistador인 Hernan Cortes는 흑인노예를 데리고 멕시코 정복에 올랐었다. 그 뒤를 따른 다른 Conquistador들도 흑인노예들을 데리고 왔으며 미주원주민들도 노예로 만들었다.
16세기 후반에는 쿠바, Hispaniola(현 Haiti)등의 Tropical Americas 에 본격적으로 아프리칸 흑인노예들을 데려왔다. 영국도 본격적으로 노예무역에 열을 올렸고 노예무역과 West Indian Island 들의 노예농장에서 들어오는 수입이 영국 전체경제의 5%를 차지하였다.
미국에서는 1,600년대부터 노예들이 들어오다가 1,750년에는 초기 13주들 전부에 노예제도가 합법적이 되었다고 한다. 18세기 후반에는 노예무역이 극심해져서 West Africa 내륙에 쳐들어가서 흑인들을 나포하여오기 시작하였는데 백인들이 직접참여 하지는 않았었고 아프리카 흑인들이 다른 부족의 흑인들을 나포하여 대서양쪽에 있던 백인 노예무역업자들에게 판매하였다고 한다.
미국 흑인들의 조상들이 Africa 서북부의 Mandinka 부족들이었다.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1,200만 명의 African 흑인들이 남북 미주에 노예로 끌려 왔다고 하는데 그중 65만 명 정도가 미국으로 왔다.
이들 아프리카 흑인들 남녀노소가 굴비들처럼 줄줄이 묶여서 갑판 밑의 선창에 갇힌 채 극악한 위생상태속에서 몇 달간 대서양을 건너오는 동안에 15%가 사망하였는데 흑인들이 나포되어서 백인노예 무역상들에게 판매되기 전까지 더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죽었다고 하며 배에서 물에 뛰어 들어가 익사하는 흑인들도 많았다.
17세기에서 18세기에 버지니아에 온 유럽인들 중에는 계약노동자들 (indentured servants)이었는데 이들은 뱃삯을 몇 년간의 노동으로 갚는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유럽에서 죄를 범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노예가 아니었던 까닭에 계약 만기일전에 도주하여 체포되더라도 흑인보다는 훨씬 더 가볍게 처벌받았다.
1,850년에 이르러서는 미국에 있던 흑인노예들은 거의 다 미국에서 출생해서 노예로써만 살아온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1,860년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당시 미국인구의 8%인 39만4,000명의 백인들이 395만 명의 노예들을 가지고 있었다. 남부백인들의 4분의1만이 노예들을 가지고 있었다.
대노예농장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으며 한 농장에 50명 이상의 노예들을 가지고 있었던 노예농장주들은 도합 만 명 이하였다고 한다. 전체 노예들 중 절반정도는 노예의 숫자가 20여명 정도인 농장들에서 일했다고 한다. 인종 차별의 뿌리는 깊어서 가장 가난한 백인도 자기가 흑인노예보다는 우수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미국이 독립한 1,776년 이후에는 노예무역은 거의 중단되었으나 미국남부에서 노예 들은 이미 경제활동의 원동력이 되어있었다 미국이 서부를 개척하기 시작하면서 노예들을 가족과 분리시켜 데리고 갔으며 노예들의 참혹한 학대가 더욱 심해졌다. 50만 명이던 노예들이 1,860년에는 4백만 명으로 늘어났다. 1,807년에는 노예수입이 법적으로 금지되었으나 노예의 밀수입은 계속되었고 노예경매 시장은 성행하고 있었다.
1,776년의 미국독립선언서 초안에는 토마스 제퍼슨이 노예제도가 죄악임을 인정하고 당시 영국왕 조지 3세가 노예무역을 조장하고 있다고 성토하는 문구가 들어 있었으나 남부대의원들의 반대로 최종안에서는 삭제되었다. 제퍼슨은 상처 후 자기의 노예 Sally Hemings 여섯 명의 자녀까지 낳아가며 동거했었다. 이 무렵에는 노예해방을 한 주들도 더러 있었으며 많은 주들이 단계적으로 노예를 해방하겠다는 Gradual Abolition 을 추진하고도 있었다. 노예소유주는 인간이 아니고 재산(chattel)에 불과한 노예들을 불구로 만들거나 죽이는 것 이외에는 무슨 짓을 하던 간에 범죄로 처벌되지 않았다.
필자는 지금까지 ‘남부’라는 용어를 마치 법적으로 경계선을 그어놓고 동질성을 가진 어느 특정지역을 의미하는 것처럼 구체적으로 정의를 하지 않은 채로 자유자재로 써왔다. 그러나 실은 남부의 의미가 시대에 따라 달라져 왔었고 반드시 지리적인 남부만을 의미 하는 것도 아니다. 남부는 지형이나 지질도 다르고 기후도 다르고 구성된 사회조차 아주 서로 다른 남쪽의 광활한 땅이다.
남부에는 오랫동안 ‘미국의 양반처럼 점잔을 떨며 백인들이 살던 버지니아가 있으며 지금까지도 Seminole 종족들이 살고 있는 밀림과 습지대인 플로리다가 있으며 남부라기 보다는 서부라고 불러야 더 정확할 애팔레치아 산맥의 서쪽에 있는 주들도 포함된다. 이처럼 다양하고 이질적인 주들에 하나의 공통점은 그 주들이 모두 ‘노예사용 주’들이라는 점이었지 남쪽에 있었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펜실베니아 주와 메릴랜드 주를 분할하는 경계선을 동서로 그어본다면 그 선을 Mason Dixon Line 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 선의 남쪽을 남부라고 부를 수 있는데 북쪽을 The Upper South 라고 부르고 남쪽을 The Lower South 라고 부를 수 있다.
동부 텍사스 주에서 시작하여 플로리다 주 사이에 있는 7개주를 The Deep South 라고도 부른다. 이 7개 주가 남북전쟁 직전에 미합중국을 탈퇴하여 The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를 건국하면서 남북전쟁이 곧 뒤따르게 되었다.
남부 주들은 도로나 기타 공공투자 등도 반대하였는데 그 이유는 연방정부에게 이런 사업들을 하도록 허용하기 시작하면 궁극적으로 연방정부가 각주에게 노예제도 폐지를 요구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던 탓이라고 한다.
남부의 이와 같은 우려가 전혀 근거가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곧 나타났다. 1,830년대에 들어서면서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북부의 사회개혁 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기 시작하였으며 그들의 주장을 담은 글들이 전국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런 움직임들은 북부사람들이 노예제도를 증오하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남부사람들은 모두가 노예를 사용하는 노예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북부사람들은 남부를 싫어하기 시작하였으며 종국에는 남부사람들을 증오하게까지 되어서 남부의 모든 것들을 싸잡아 “나쁘다”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들이 “억울하게 비난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남부사람들은 “남부의 모든 것들은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하였고 남부에 대한 모든 비난은 월권적인 외부의 간섭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노예제도의 폐지가 아니라 존속을 위해서 전력을 쏟아 붓게 되었다.
남부와 북부가 점차 분열하게 된 데에는 노예문제 이전에 미국의 산업구조적인, 전통적인 남북 간의 차이에서 시작된 오랜 갈등이 있었다. 건국초기부터 남쪽은 기후, 지형, 지질 등이 농업에 적당하여 농업이 주산업이 된 반면에 북쪽은 공업, 상업, 금융업, 무역업 등에 치중하게 되었다. 노동집약적인 농업을 하던 남쪽에서는 항상 일손이 모자랐고 계약노동자들이던 노예이던 간에 노동력이 항상 필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