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A씨는 몇 년 전 출근길에 라디오를 듣다가 귀를 의심했다. 남가주에서 잘 알려진 어느 방송인의 라디오 칼럼을 듣던 중이었는 데 내용이 너무 친숙한 것이었다. 어디선가 분명 듣거나 보았던 내용이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출처를 알 수 있었다. 한국에서 발간되는 한 시사 월간지에 게재된 내용이었다. 미주에 살면서 한국의 시사 월간지까지 사서 보는 독자는 거의 없다. 남가주 방송계의 원로로 꼽히는 앞의 인사도 필시 그 점을 노렸을 것이다. 그래서 남의 칼럼을 방송에서 그대로 읽었는데, A씨에게 딱 걸린 것이었다. A씨는 그 월간지를 매달 구독하고 있었다.
“남의 글을 자기 논평인 것처럼 방송하는데 참 뻔뻔스럽더군요.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한 것이겠지요.”
문제의 방송인이나 방송국에 문제 제기를 할 만한 성의는 A씨에게 없었다. 하지만 그 후 그 인사가 무슨 말을 해도 믿기 어려웠을 것은 당연지사다. 명백한 남의 글 훔치기, 뻔뻔한 표절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소설계의 거목으로 꼽히던 신경숙씨가 생애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몇몇 작품들이 표절 시비에 휘말리면서 그가 이제껏 쌓아올린 모든 공든 탑들에 의심의 눈초리가 쏠리고 있다.
‘표절이다’라고 지적된 부분들을 비교해보면 표절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만큼 표현이며 구도가 비슷하다. 논란이 처음 제기된 것이 1990년대 말이었으니 그 긴 세월 참 용케도 버텼다는 생각이 든다.
거대 출판사들과 산하 문예지, 그리고 그에 소속된 비평가들이 키워주고 덮어주며 스타를 만든 결과라는 분석이다. 그런 부분을 감안한다 해도 표절이라는 부끄러운 행위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작가 자신의 몫이다.
표절 시비는 사실 어디서나 있어왔다. 남가주 한인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앞의 방송인 케이스가 뻔뻔한 표절이라면 상당히 순진한 표절도 있다. 몇 년 전 남가주의 한 문예지에 짤막한 시가 실렸다. 나이가 좀 지긋한 어느 여류 시인의 시였다.
그런데 그 시가 너무 유명한 시여서 한 원로문인의 눈에 띄었다. 시는 19세기 미국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의 시를 그대로 번역한 것이었다. “아니, 다른 시도 아니고 이 유명한 시를 자기 시라고 발표하다니... 너무 순진한 건지 …” 원로문인은 기가 막혔다.
상당히 심각한 표절 사건도 있었다. 지난 2000년 미주 문예지에 발표된 어느 문인의 평론이 표절로 드러나 남가주 문단이 한바탕 시끄러웠다. 문제의 평론이 1992년 한국에서 발표된 어느 대학교수의 평론을 그대로 베낀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뭔가 작품을 내기는 내야 하겠는데,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고, 시한은 다가오고 … 그래서 두 눈 질끈 감는 것이 아마 표절일 것이다. 누구도 처음부터 작심하고 표절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인터넷 시대, 단어 몇 개 입력하면 온갖 정보가 떠오른다. 바보가 아니라면 ‘표절은 이제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