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환>
Kansas-Nebraska Act의 입법은 북부지역에서 엄청난 반발이 일어나게 하였다. 북부의 여러 주들에서 반대 대회들이 열렸고 위스콘신 주의 대회에서는 노예제도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서 새 당을 창당하자고 결의하였다.
1852년의 대통령선거 패배로 거의 와해되어가던 Whig당원들도 가세한 가운데 1854년 7월6일에 미시건 주의 Jackson 에서 The Republicans 라고 정식으로 이름을 지은 새 당이 창당되었다.
이들은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이 만든 당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원래는 The Democratic Republicans 라고 부르던 당명에서 Democratic 을 떼어버리고 The Republicans 라는 새 이름으로 창당하였다.
공화당의 강령에는 “1. 노예제도는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악한 제도이다. 2. Kansas-Nebraska Act 와 The Fugitive Act of 1850은 폐기 되어야 한다. 3. 우리는 모든 차이를 극복하고 노예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온 힘을 다할 것이라는 강력한 의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창당당시의 강령만으로 보면 “반이민, 반서민, 반유색인, 친부유층 보수적 정당”으로 분류되는 근래의 공화당이 지난 160여 년 동안에 많이 변질된 것임을 알 수 있다. 1854년에 북부 여러 주들에서 공화당의 주당조직대회들이 열렸다.
한편 대통령선거가 있었던 1852년에는 다수당이었던 민주당의 인기는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1854년의 선거에서 작은 “혁명”이 일어났다. Kansas-Nebraska Act 에 찬표를 던진 42명의 민주당소속 하원의원 중 7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낙선되었다. 당내의 분열로 극도로 약화된 Whig 당에서 북부쪽 당원들은 다른 당으로 뿔뿔이 헤어져 나갔다.
1854년의 총선결과 민주당의 의석은 83석으로 줄어들었고 공화당은108석을 차지하였으며 역시 새 야당이었던 ‘무지당’(“Know Nothing “ Party) 은 43석을 차지하였다. 정국의 혼란으로 여러 개의 새 정당들이 이합 집산하던 끝에 공화당과 무지당만 존속하였다. 세상에 아무리 무지가 판을 치는 것이 정치판이라고 하더라도 “무지”당이라니!
1840~50년대에는 새 이민들이 파도처럼 몰려오기 시작하였고 먼저 와서 자리 잡고 살고 있던 사람들이 “위협”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이 개신교자들이었던 이들 “기득권” 사람들은 1849년부터 비밀리에 조직을 시작하여 공식적으로는 American Party 라는 우파 보수정당을 만들었고 그 당의 주목적은 새 이민, 특히 가톨릭계 이민들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그 당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당신네 당의 정강은 무엇이요” 라고 물으면 “가톨릭계 새 이민들을 단속하는 일이요” 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이 American Party 의 당원들은 하나같이 “나는 모르오” (“I know nothing”) 이라고 대답하여서 그들을 Know Nothing Party 라고 불렀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지당은 성분상 공화당과 비슷해서 양당이 합하면 하원의 절대다수의석을 차지하게 되었었다.
Kansas 영토 내에서는 어느 쪽이든 거주민의 다수 쪽이 노예제도 허가여부를 결정하게 될 것임으로 노예제도 반대주의자들인 뉴잉글랜드 사람들과 친노예제도 주의자들인 남쪽사람들이 총으로 무장한 채로 이주하기 시작하여서 양측의 무력충돌은 불가피하게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56년 5월에 친노예제도 주의자인 어느 지역의 경찰서장 (sheriff) 이 “폭도”들을 이끌고 반노예주의자들이 사는 동네에 들어가 집들을 부수고 방화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보복으로 반노예주의 지도자인 존 브라운은 자신의 네 아들을 포함한 “폭도”들을 이끌고 친노예 주의자 동네에 쳐들어가자고 있던 다섯 명의 남자들을 끌어내 칼로 두개골을 깨어 죽이는 끔직한 사건이 일어났다.
브라운은 백인으로 노예해방운동의 순교자가 될 것을 공언하고 다녔던 사람이었는데 Underground Railroad에도 참여하였으며 해리엇 튜만(Harriet Tubman)을 자신의 운동에 끌어드리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당시의 흑인 지도자 프레드릭 더글라스(Frederic Douglas)에게도 참여를 요청하였으나 더글라스는 조언만 주었고 참여하지 않았는데 더글라스는 브라운 식의 과격한 무력항쟁으로 노예해방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브라운은 무력투쟁으로 백인들과 싸워 노예해방을 이루어야 한다고 노예들을 선동하였는데 동조하는, 아니 더 정확하게는, 할 수 있는 노예들이 거의 없었다. 남부 백인 농장주들은 노예들의 무장봉기를 가장 두려워하였었던 까닭에 브라운은 남부 백인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브라운은 백인 16명, 흑인노예 5명 등과 함께 1859년 10월 16일부터 4일간 Harper’s Ferry Arsenal 이라는 무기저장소를 습격하여 점령하고 있다가 후일 남북 전쟁 때 남군 총사령관이 되는 로버트 리 대령이 이끄는 해병대의 토벌작전으로 다섯 명은 도주하고 Brown 은 생포되고 나머지는 사살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토벌군 중 제일 먼저 전사한 사람은 자유흑인이었다. 그해 12월 2일에 브라운은 “천륜을 배반하는 노예제도 종식을 위해서 나의 한목숨을 주저 없이 바친다” 고 얘기한 후 교수형을 받았다고 한다.
노예제도 허가여부를 투표가 아니라 무기로써 결정하려는 사태들이 일어난 것이다. 남북전쟁이 이때 캔자스에서 시작되지는 않았지만 연쇄적인 유혈보복 폭행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양측의 극한대립과 분수를 가릴 줄 몰랐던 폭행사건을 하나 더 얘기해보고 글을 끝내고자 한다.
매사추세츠 주의 Charles Sumner 연방 상원의원은 원내발언에서 “캔자스에 대한 범죄”를 규탄하고 남부와 남부지역 상원의원 몇 명을 모욕적인 언사를 써가며 극렬히 비난하였다. 그때는 아직 결투가 성행하던 시절이었다. Sumne로부터 모욕을 받은 어느 상원의원의 조카인 사우스 캘리포니아 주의 연방하원의원 Preston Brooks 는 1856년 5월 22일에 상원의 의석에 앉아있던 Sumner상원의원을 지팡이로 의식을 잃을 정도로 구타하였다.
하원이 징계안을 의결하자 Brooks는 하원의원직을 사직하였다. 그는 즉각적으로 남부의 영웅이 되었다. 보궐선거에 재출마한 Brooks 는 오직 여섯 개의 반대표만을 받고 재선되어 하원으로 돌아왔다. 당시의 정치인들과 미국국민들의 정서와 분열정도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Sumner 의원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여 잔여 임기동안 비어있던 그의 의석은 미국의 역사적인 비극의 상징으로, 남북대화 단절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만일 위와 같은 폭행이 지금 어느 의사당에서 자행된다면 현재의 미국사람들은 그런 나라를 제3세계국가라고 얕잡아 본다. 부끄럽게도 2015년의 한국의 국회가 1850년대의 미국수준에서 별로 발전한 것이 없어 보일 적도 가끔 있는 것 같다.
Quiz: 미국여성 중 어느 분이 남편도 대통령이고 아들도 대통령일 만큼 억세게 팔자가 좋은 사람이었을까요?
답: 아비게일 애덤스(Abigail Adams) 여사는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부인이었고 제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의 어머니이었다. Barbara Pierce Bush 여사는 제41대 대통령 조지 H. 부시의 부인이었고 제43대 대통령 조지 W. 부시의 어머니였다. 만일 운수가 대통해서 플로리다 주지사를 두 번 지낸 셋째아들 젭 부시가 공화당의 공천을 받아 2016년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다면 두 대통령의 어머니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이다. 바바라 여사는 제14대 대통령 Franklin Pierce의 10촌 형제의 고종손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