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흰빛 / 박영근

2015-06-16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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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빛 / 박영근

김성일 ‘우먼’

밤하늘에 막 생겨나기 시작한 별자리를 볼 때가 있다. 그래
고통은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잣소리로 미쳐갈 때에도
밥 한 그릇 앞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
치욕일 때도
그것은 어느새 네 속에 들어와 살면서
말을 건네지 살아야 한다는 말

그러나 집이 어디 있느냐고 성급하게 묻지 마라
길이 제가 가닿을 길을 모르듯이
풀씨들이 제가 날아갈 바람 속을 모르듯이
아무도 그 집 있는 곳을 가르쳐줄 수 없을 테니까
믿어야 할 것은 바람과
우리가 끝까지 지켜보아야 할 침묵
그리고 그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
이렇게 우리 헤어져서
너도 나도 없이 흩날리는
눈송이들 속에서

그래, 이제 시는 그만두기로 하자
그 숱한 비유들이 그치고
흰빛, 흰빛만 남을 때까지



/ 박영근 (1958-2006) ‘흰빛’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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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안치환이 노래한 ‘솔아 솔아 푸른 솔아’의 시인이며 한국 최초의 노동자 시인이기도 한 박영근 시인의 시를 읽는다. 노동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자 했던 그가 보여주는 진정한 삶에의 의지는 고요하고 깊다. 눈송이처럼 덧없는 인생길이지만 가슴 속에 진정한 불을 밝힌 채 살기 염원한 이. 나 하나만 잘 되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이 판을 치는 세상 그 어딘가에 시대의 십자가를 지고 살고 있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생각게 한다.

<임혜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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