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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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52) 1850년의 노예제도 대협상

2015-05-0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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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환>

미국역사책에는 ‘The Compromise of 1850’이라고 기록되어있는 중대한 역사의 한 대목을 독자들의 쉬운 이해를 위해 위에 적은 것처럼 필자가 조금 확대 의역해 보았는데 이 번호의 글을 읽으신 후 필자의 의도에 동감하시게 되기를 바란다.

미국의 역사를 보면 인종차별문제가 아주 뿌리가 깊은 고름상처임을 알게 된다. 인종차별의 뿌리는 노예제도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고름상처는 ‘근치’를 하지 않으면 지구 중심에서 이글거리고 있던 용암이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은 지진이나 화산으로 폭발 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미국이라는 몸뚱이를 괴롭히다가 남북전쟁이라는 대수술을 받고 나서야 우선 생명은 부지하게 되었으나 아직도 근치는 되지 못한 것 같다. 미국의 노예제도에 대해서는 차후 별도로 써 보고자 한다.


1848년에 제12대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건국초기부터 미지근하게 데워지기 시작 했던 노예제도 찬반문제는 매번 대통령선거 때마다 중요한 쟁점이 되어 왔었는데 드디어 1848년의 선거 때에는 가장 중요한 선거쟁점이 되어 있었다.

이 hot potato는 하도 뜨거 워서 각 정당들이 손에 쥐기를 기피하는 애물단지가 되어 있었다. 대통령선거가 끝난 후 에도 2년여 간 당시의 대정치가들의 혼신의 정쟁과 대통령 급사라는 홍역을 거친 끝에야 겨우 ‘The Compromise of 1850’ 이라는 미봉책을 내놓아 피할 수 없는 남북전쟁을 10여년 연기하게 되었다.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북부사람들이 주종을 이루던 민주당은 미시간주지사 Louis Cass 를 대통령후보로 공천하였는데 그는 국토확장주의자 (The expansionist) 이었고 남부 쪽에도 호의적이었으나 노예제도에 대해서는 입장이 분명치 않은 사람이었다.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남부사람들이 주종을 이루던 Whig 당은 멕시코전쟁의 영웅이었던 Zachary Taylor 장군을 대통령후보로 공천하였다. Whig 당은 멕시코전쟁을 반대했던 정당이었지만 전쟁영웅의 당선확률이 높은 것을 이용했었다. 실은 양당이 전부 Taylor 를 자당의 후보로 공천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그는 노예를 300명이나 거느린 루이지애나 주의 대 사탕수수 농장주로써 선거에 투표도 자주 하지 않던 직업 군인으로 정치에 경험이 전혀 없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막상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었다고 한다. 노예문제를 기피하기 위하여 Whig 당은 고의로 그해에는 정강을 내놓지 않았다.

양당이 노예문제를 고의로 기피하는 것에 실망하고 분개한 일부의 민주당원들은 양심파 Whig 당원들 및 노예 해방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The Free Soils 당을 창당하여 전 대통령 Martin Van Buren 을 대통령후보로, John Quincy Adams 전 대통령의 아들 Charles F. Adams 를 부통령후보로 공천하였다. 결국 The Free Soils 당이 민주당 쪽의 표를 많이 잠식하여 Whig 당의 Taylor 가 근소한 득표의 차이로 당선되게 되었다.

당시의 상원에는 노예제도주의장들인 남부출신 켄터키 주의 헨리 클레이, 부통령을 지낸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John Calhoun의원들이 있었고 노예제도 반대주의자들로는 뉴욕주의 William Seward, 매사추세츠 주의 대웅변가 Daniel Webster 의원 등이 있었다. 여기에 절충의 전문가로 알려지고 후일 대통령후보로써 Abraham Lincoln 에게 패배한 일리노이 주의 Steve Douglas 상원의원도 있었다.

노예제도 폐지가 강행된다면 남부 주들이 미합중국에서 탈퇴하겠다고 위협하는 가운데 Calhoun 의원은 노예문제의 해결책으로 북부와 남부에서 각각 대통령 한명씩을 뽑자는 극단적인 제안을 할 정도였고 Seward 의원은 노예제도주의자들과는 상대도 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입장으로 대립하자 국가분열의 가능성을 심각하게 우려한 Webster 의원은 자신의 지지자들로부터 “배신자” 라는 혹평을 들을 것을 알면서도 여러 시간에 걸친 상원의 긴 연설에서 Clay 의원의 절충안을 지지하였다.

Clay 는 노예문제해결의 타협안으로 1. 멕시코에서 취득한 California 주는 비노예 주로 만들고, 2. 어느 주에서나 도주한 노예를 모든 주에서 체포하도록 하는 “The Fugitive Slave Act of 1850” 을 입법하고,
3. Washington, D.C. 에서 노예판매 거래를 불법화하되, 4. 그곳의 노예제도는 존속시킨다 라는 타협안을 내어 놓았다. 소위 “The Compromise of 1850” 을 제안한 것이다. 국회는 Clay 의 절충안들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문제는 타협이 없는 노예주의자인 Taylor대통령이었다. 그는 멕시코에서 새로 취득한 California 와 New Mexico 주를 당장에 노예주들로 만들지 않으면 Clay 의 타협안에 거부권을 행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낭떠러지에 당면한 정국에 “기적”이 일어났다.
1850년 7월 4일에 Taylor 대통령은 그때에는 아직 미완성이었던 Washington Monument 앞에서 거행된 독립기념일 행사에 참석하였다. 기록적인 무더위속의 이 행사 에 참석하고 돌아온 Taylor 대통령은 그날부터 위병이 생겨났고 닷새 후에 사망하였다.

그가 행사 후에 cherry 한 접시를 먹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가 독살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도 한다. 부통령 Millard Fillmore 가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정치타협에 능란했던 Fillmore 대통령은 상원 측에서 Steve Douglas 상원의원의 협력을 받아서 1850년 9월에 타협안 법률들에 서명하였다.

The Compromise of 1850 으로 난제들을 해결하였다고 보는 짧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으나 실은 병은 근치되지 않았고 대수술이 몇 년 앞으로 미뤄진 것뿐이었다. The Fugitive Slave Act of 1850 은 반노예주의자들을 더욱 단결하도록 만들었으며 한 가지 더 소득이 있었다면 이 법률들이 생긴 후 십여 년 후에 남북전쟁이 시작되었음으로 북부가 공장들이 더 많이 생겨나서 경제력이 강해지고 철도등도 많이 놓게 되어 전쟁에 훨씬 더 충실하게 대비할 수 있게 되었었다.
The Fugitive Slave Act of 1850 은 도주한 노예를 연방공무원 뿐만 아니라 주나 시의 공무원들이나 일반 시민들까지도 체포 하도록 하는 법으로써 남부를 달래기 위해서 제정된 법이었다.


더러는 그리 흔하지 않았던 free black 과 흑인 아이들까지 마구 길거리 에서 “체포”되어 노예로 팔리는 지경으로 이 법이 악용되었었다고 하며 월급대신 판결하는 건수에 따라 fee (재판료) 를 받던 판사들은 잡혀온 흑인마다 “도주흑인”이라고 판결했었다는 데 무죄판결일 때에는 fee 가 5불이었으나 유죄판결일 때에는 fee 가 10불이었던 까닭이었고 흑인은 자신을 법정에서 변호할 권리가 없었다고 한다.

북부 주들은 이 법을 무력하게 만들어 버리기 위해서 The Personal Liberty Laws 들을 주법으로 입법하였는데 이 법들은 자기주의 공무원들이나 주민들에게 법원이 연방법인 The Fugitive Slave Act of 1850 을 집행하는 것에 협조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노예들이 보호를 받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규정한 법이었다.

북부사람들은 연방법 The Fugitive Slave Act of 1850 에 대항하여 그전부터 비밀리에 오랫동안 운행해오던 “Underground Railroad” 를 더욱 확장하고 재정비하였다. Underground Railroad 는 “지하철도”가 아니고 노예들이 노예주를 탈출하여 비노예 주나 캐나다로 도주하는 것을 돕던 지하조직으로써 중간 중간에 “역”이 있었고 도주 중인 노예들을 안내하는 “여객전무”도 있어서 이런 별명이 부쳐진 것이었다.

Underground Railroad 는 여러 교파의 교계들과 노예해방주의자들에 의하여 운영되었는데 활동자금을 내주는 사람들을 Stockholders 라고 불렀으며 철저한 보안유지를 위해서 다음 “역”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노예들은 성경의 용어를 인용해서 노예주와 비노예 주를 가르던 Ohio 강을 “요단강” 이라고 불렀고 캐나다를 ‘The Promised Land’라고 불렀었다고 한다.

때로는 Freedom Train 이나 Gospel Trains 이라고도 불렸던 이 Underground Railroad 가 남북전쟁이 시작된 1861년까지 7만5천 내지 10만 명으로 추측되는 노예들을 “운송”하였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여객전무로는 Harriet Tubman이라는 전 노예가 있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 남부로 내려가서 노년의 자기 부모들을 구출했을 뿐만 아니라 총 300여명의 노예들을 운송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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