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와 장소에 따라 예의가 있다. 누가 궂은일이나 좋은 일을 맞이하면 그에 따라 말과 행동과 표정을 달리하여 그를 대한다. 한민족은 고대시대부터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 불릴 정도로 예의를 매우 소중한 가치로 여기며 살아 왔다.
그럼에도 요즘은 예의 혹은 에티켓을 불편해 하거나 귀찮게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의의 본래의 정신은 괜한 번거로움이나 짐짓 가식적 행동의 요청이 아니라,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서로 공감하며 살자는 ‘공감의 삶’에 그 뜻이 있다.
갑자기 예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오늘날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하여 상식을 벗어난 무례하고 생각 없는 행동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하여도 예의가 있어야 한다. 긴급한 도움이 필요한 사람 앞이나 생사가 갈리는 화재 현장에서 이른바 인증샷을 찍거나, 고통 가운데 있는 세월호 유가족을 조롱하는 사진을 올리는 일 등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자신의 고통만을 고통으로 여길 뿐,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하여는 무감각하거나 외면하고, 심지어 희화화하여 조롱하기까지 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하여 함께 아파하지 않는다면 나의 고통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여겨질 것이다. 내 고통뿐 아니라, 모든 고통은 다 아프고 힘들다. 다른 사람의 고통 앞에서 겸손하고 진지하게 마음을 여미고 공감해야 할 이유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하여 공감의 마음을 회복해야 할 때이다. 따뜻한 공감은 나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성숙한 이해에서 나온다. 고통의 아픔을 깊이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겨 아픔을 함께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먼저 고통에 대한 개인적 성찰이 필요하다. 많은 현대인들이 막상 고난과 고통을 당하면 당황해 하고 어쩔 줄 몰라 한다. 고통을 실패나 절망이나 불행으로 여기기거나, 무조건 고통에서 회피하려 한다. 고통을 극복하려는 마음을 지레 포기하거나, 심지어 아예 생의 의욕을 놓아 버리고 자살하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다.
고통은 결코 실패나 절망이나 불행이 아니다. 고통은 인생의 여정 가운데 누구나 맞이할 수 있는 것이며, 어떤 고통도 반드시 그 끝이 있으며(지나가며), 고통의 극복은 우리 인생을 내면의 성숙과 초연한 행복 그리고 영원한 진리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고통에 대한 사회적 성찰이 있어야 한다. 물론 흔히 만나는 고통은 개인의 부주의나 무지 혹은 잘못으로 인해 당하는 개인적 고통들이다. 그러나 요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고통의 상당 부분은 사회와 관련하여 일어나는 사회적 고통들이다.
취업 스트레스, 군대의 억압적 문화, 경제적 양극화, 성폭력, 각종 차별, 대형사고 등으로 겪게 되는 엄청난 고통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들을 본다. 이들을 모두 한 개인의 의지력 부족이나 성격의 문제 혹은 윤리의식의 문제로 돌려 버릴 수 없다. 현대인의 고통의 대부분은 사회적 상황과 관련이 있는 사회적 고통이다.
앞으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고통’의 요인들은 점점 더 늘어날지 싶다. 개인은 물론 사회 전체가 고통을 성숙하게 다루어 나갈 수 있도록 다양한 사회적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하여 따뜻한 공감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겨, 깊이 이해하고 배려하며 사는 ‘공감의 삶’이야말로 불시에 엄청난 무게로 다가올지 모르는 ‘고통’의 현실로부터 자신과 우리 사회를 지켜줄 버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