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는 가끔 출몰했던 무장공비 대비로 군에 ‘5분대기’라는 조직이 있었다. 유사시 5분 내로 출동해야 하므로 평소 수시로 비상 출동훈련이 있었고 그때마다 지정된 장소에 대기 중인 전용 트럭에 올라타고 준비 태세를 점검하곤 했다.
어느 늦은 봄 저녁, 비상 출동신호에 따라 평소 하던 대로 개인 화기를 지참하고 신속히 달려가 트럭에 올라탔다. 인원과 장비 점검 후 해산하는 것이 통상의 훈련 절차였는데, 그 날은 계속 대기상태를 유지했다.
지휘관으로 부터, 훈련이 아니고 ‘실제 상황’이니 실탄을 배분한다는 지침이 내려졌다. 모두들 처음 경험이라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훈련에는 익숙했지만, 실제 상황이라니 감이 잡히지 않는 듯 잠시 머뭇거리다 트럭위에 있던 실탄 상자를 개봉하고 실탄을 배분하기 시작했다. 옆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신속하게 배분이 완료되었는데, 나중에 보니 문제가 생겼다.
탄창낭 두개씩을 받아서 양쪽허리 춤에 매달아야하는데, 몇 명에게는 하나씩만 배당이 된 것이다. 병력 수와 실탄 준비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주변에 남는 탄창낭이 있는지 다시 확인해 보라는 긴박한 소리, 마지막으로 총구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총구 소제기구를 재촉하는 소리, 각자 총기를 작동시켜 보고 나는 철커덕 소리, 탄띠와 철모 끈을 조이는 등 어둠 속에서 긴박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 한쪽 구석에서 자그만 흐느낌소리가 들린다. 주인공은 말년 병장 K. 소대의 리더로 모두가 알아주는 모범 사병인 그가 넋두리를 한다. “한달 후면 제대하고, 3년을 기다려준 애인과 약혼하기로 했는데...”제대 날자가 창창한 나에게는 공감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살기위해서는 철저히 준비하는 게 당장 해야 할 일이었다. 다시 한번 점검해보니 입고 있는 군복이 문제다. 새로 지급 받은 옷인데, 세탁 몇 번에 색이 바래다 못해 흰색에 가깝다. 외출용으로 부적합해보여 주로 부대 내에서 입었는데 하필 오늘 같은 날 그 불량품을 입고 있다니 난감해진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소 차이는 있지만 대원 중 다수가 비슷한 행색이다. 공주의 우금치 고개를 공격하는 흰옷 입은 동학 농민군의 모습이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희끄무레한 물체는 눈에 쉽게 띄기에 교전 중 우선 표적이 될 것이 뻔하다. 총에 맞으면 죽을까? 몹시 아플까? 온갖 잡생각들이 머리를 스쳐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세탁할 때 살살 문지를 걸.
무선 교신 소리가 빈번하고 가끔 큰 소리도 오가는 것을 보면 상황이 급박하게 진행되는 모양이다. 순간, 머릿속을 번쩍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다. 훈련소에서 가장 귀찮게 여겼던 과정이 최상의 해결책으로 떠올랐다. 갯벌에 한번 구르면 되지 않을까? 어둠속에 갯벌을 뒤집어 쓴 모습은 최상의 위장이겠다. 출동준비 끝. 40여년 전의 한 모습이었다.
최근 뉴스를 보니 아직도 방산 비리는 제대도 하지 않고 현역인 모양이다. 지급된 방탄판이 북한군의 총탄에 뚫린다 한다. 북한을 주적에서 뺏다 넣었다 하다보니 그렇게 된 모양인데 입대 장병들은 헌 전화번호부 한부씩 지참하면 유사시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일부 군 장비에도 가짜나 위조 성적표로 납품된 부품이 쓰였다니 장병 본인의 생명은 물론 국방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일부 군 간부들은 방산 비리에 연루되거나 성 문제 등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국가 안보상황이 여유로워 보이지 않는데 골프채나 휘두르는 군 간부들의 모습이 예사스럽지 않다.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여유와 자신감일까, 아니면 자포자기의 표현일까?한가지 기본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국방에 한 치의 차질이 있어서는 안된다. 누구를 탓하고 손가락질하기 전에 씹던 껌이라도 붙여서 우선 구멍은 막아야 한다.
방산 비리의 숙주인 부정부패는 사회전반의 문제로 하루아침에 해결될 사안이 아닌 것 같다. 시간이 걸릴 것이다. 차츰 나아지길 기원하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답답하지만 ‘실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