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문학은 만남이다 (김희봉 / 수필가)

2015-03-21 (토)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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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만남입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버클리 문학회 특강에서 서울대의 권영민 명예교수가 던진 첫 말이었다. "저는 두 시인의 만남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그들의 작은 만남이 한국문학사에 얼마나 큰 족적을 남겼는지 소개하겠습니다."그는 마치 다큐영화를 틀듯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1939년 일제강점기, 촉망받는 시인 두 명이 문단에 나란히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잡지 ‘문장’을 통해 데뷔한 박목월과 조지훈입니다."두 시인이 등단한 직후, 일본의 한글 말살정책으로 모든 신문과 잡지들이 문을 닫고, ‘문장’도 강제 폐간됐다. 지훈과 목월도 펜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지훈은 혜화전문(동국대의 전신)을 졸업한 뒤 바로 오대산 월정사로 들어갔고, 목월은 고향 경주에 머물며 금융조합 서기일을 했다. 누구도 이들을 시인으로 알아주지 않던 시기였다.


글에 목말랐던 지훈은 다른 문우들의 근황이 궁금했다. 1941년 봄. 그는 옛 잡지에서 찾은 주소로 목월에게 편지를 썼다. 얼굴 한 번 보고싶다는 내용이었다. 큰 기대를 하지 않던 지훈에게는 뜻밖에도 목월의 답장이 닿았다. ‘경주박물관에는 지금 노오란 산수유가 한창입니다. 늘 외롭게 가서 보곤 하던 싸느란 옥적(玉笛)을 마음속 임과 함께 볼 수 있는 감격을 지금부터 기다리겠습니다."권 교수는 마치 서사시를 읽듯 만나는 순간을 묘사했다.

"1942년 이른 봄날 해질녘의 건천역. 하늘에서는 봄비가 분분히 내렸습니다. 목월은 한지에 ‘박목월’이라고 자기 이름을 써들고 기다렸습니다. 기차가 역구내로 들어오고... 마지막으로 천천히 내려선 사내. 훤칠한 키에 긴 머리를 출렁거리던 신사. 조지훈이었습니다."

목월은 스물 여섯, 지훈은 스물 둘. 암흑의 시대를 살아가던 두 시인은 이렇게 처음 만난 뒤 따뜻한 문학적 동지가 되었다. 둘은 폐허의 고도 경주의 여관에서 거의 매일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문학과 역사를 논했다.

조지훈은 열흘 넘게 경주에 머물렀다. 그리고 둘은 헤어졌다. 지훈이 목월에게 고마움의 편지를 보내왔다. 목월을 위해 정성스레 쓴 시 한 편이 덧붙여져 있었다. ‘완화삼’이었다.

’차운 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목월은 밤새 화답시를 준비한다. 그것이 바로 ‘나그네’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이 아름다운 만남은 광복 후 박두진과 함께 엮은 3인 시집 ‘청록집’으로 꽃피우게 됩니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한국 현대시의 정신적 좌표가 됐습니다."

내가 권 교수를 처음 만난 것이 1990년 초. 그가 버클리 대학에 초청교수로 왔을 때였다. 그는 이민 후 거의 잊혀졌던 소설과 최태응 선생의 초기작품들을 발굴, 한국문학사에 재조명시키는 일을 벌였다. 또한 북가주에서 문학인들의 글을 모아 책을 내었다. 1995년에 펴낸 그 책의 이름도 ‘서른 세사람의 만남’이었다. 그후 그는 대학으로 돌아가 후학을 가르쳤고, 우리는 생업과 함께 북가주에서 ‘이민문학’을 계속해왔다. ‘서른 세사람의 만남’이 나온 지 꼭 2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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