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49) 미국의 산업혁명<3>

2015-03-13 (금)
크게 작게
<조태환> 1790년대 말에도 영불관계는 계속 좋지 않았다. 신생 약소국인 미국은 때로는 영불간의 불화에 방관자로써, 때로는 한쪽의 힘을 빌려 다른 쪽을 견제하는 등 항상 조마조마한 국제관계를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1798년 1월에는 불란서의 새 집권자 나폴레옹으로 부터 무력위협을 받아오면서 혹시 전쟁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속에서 미국이 속히 군비강화를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선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이 musket이라 불리던 장총 수만 정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미국은 장총을 한꺼번에 살 돈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돈이 있어도 장총을 살 데도 없었다. 장총을 만드는 것은 고도의 기술이 있는 Gunsmith가 필요한데 미국에는 Gunsmith가 한명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설령 몇 명이 있더라도 어떻게 수만 정의 장총을 짧은 기간에 만들어 낸다는 말인가! 좋은 Gunsmith는 스승 밑에서 수년의 도제생활을 하여야만 제총의 A to Z 를 배울 수 있던 시절에 말씀이다.

“이런 때에 우리의 재주꾼 Whitney 는 어디로 가불렀당가?” 라는 소리들이 나오자 “나 여기 있당게로!”라고 소리치면서 Cotton Gin 의 파산잿더미를 털며 Whitney 가 재등장 한다.
미국의 군비사정을 다 들어본 Whitney는 “그 까짓것 문제없다 이 말이여!” 라고 큰소리를 치면서 Washington 으로 쫓아가 전쟁성에게 “내가 3년 안에 장총 1만정을 우선 납품하겠다” 고 주장하였다. Whitney의 명성은 들어서 알고 있었으나 너무 맹랑한 주장 이라는 것은 짐작하였었지만 달리 무슨 방도를 모르던 전쟁성은 1800년도말까지 장총 1만정을 납품하도록 1898년 1월에 Whitney와 계약을 하였다.

발명의 천재답게 Whitney는 연구에 몰두하였다. 장총에는 총신에서 개머리판에 이르기까지 50여개의 부품이 필요하였는데 대패질만 잘하면 되는 개머리판 같은 단순한 부품이 있는가하면 총신 안에 나선형의 줄을 조각을 해야 하는 것처럼 초고도의 고급기술이 필요한 것까지 Gunsmith는 많은 일들을 혼자서 해내어야 했었다. 그러므로 Gunsmith는 누구나 오랜 수련이 필요한 고급 장인이었다. 모든 완제된 장총에는 Gunsmith의 아호라도 새겨 넣어야 할 만큼 귀중한 예술품이었다.


최고급 다이아몬드반지가 똑같은 것이 두개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같은 Gunsmith가 같은 망치를 써서 만들었을지라도 똑같은 장총은 없었다. Whitney는 아마 이 장점(약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Whitney 는 최고도의 기술을 가진 Gunsmith 한명이 장총 50자루를 만드는가 보다는 기술은 장인보다 훨씬 떨어지는 ‘쟁이’들 50명이 한 부품만을 50개씩 정확히 동일하게 생산해서 장총을 조립하는 것이 더 빠르고 쉬우리라 생각하였다.

자신의 착상이 옳은 것 이라고 확신한 Whitney는 그 후 2년 동안 50개의 부품을 정확히 똑같게 자동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기계들을 제작하는데 전념하였다. 정확하게 똑같은 부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계만 만들어내면 Gunsmith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였다. Gunsmith 대신에 몇 시간만 훈련시켜서 기계를 조작할 줄만 아는 ‘쟁이’만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드디어 1801년 1월에 Washington 에서 John Adams 대통령, Thomas Jefferson 부통령, 전쟁성장관, 재무성장관 등 전 각료들이 참석한 가운데 생전 장총을 한 번도 만들어 보지 않았던 Whitney 의 지휘아래 몇 명의 쟁이들이 50가지의 부품들을 쌓아 놓은 테이블에서 아무것이나 부품 한 개씩을 집어다가 불과 몇 분 만에 열개의 장총을 조립해 내었다. Whitney 는 결국 1809년에 위에 말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만든 장총 1만개를 납품하였다.

Whitney는 이 장총제조방법으로 두 가지 산업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첫째는 제품의 표준화 (standardization)이다. 이제는 똑같은 다이아몬드반지를 열개라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둘째로는 호환성부품 (interchangeable parts) 을 제조한 것이다. 이전의 장총은 전투 중에 고장이 나면 총을 후방에 보내서 전문가가 고친 후에야 다시 쓸 수 있었다. 그러나 Whitney 으로 제조된 장총이 고장이 나면 즉석에서 고장 난 부품만 병사자신이 바꿔 끼우면 즉시 재사용이 가능해졌다.

Whitney식의 제조법을 Uniformity System이라고도 불렀고 Interchangeable System 라고도 불렀는데 이 시스템은 미국의 많은 공장들에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공장들이 Skill of Man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Skill of Machine에 의존하기 시작하였다. 결과적으로 미국이 스위스보다 더 좋은 자물쇠와 시계 등을 더 싸고 더 좋게 공장에서 기계로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 Mass Production 제도는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높여서 기업의 이익을 증대시켜 주었고 노동자의 임금도 올라가도록 하였으며 공산품가격의 하락으로 미국 국민들의 일반적인 생활수준이 높아갈 수 있고 미국경제가 전체적으로 크게 성장되도록 하였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