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한 침묵
2015-02-12 (목) 12:00:00
한국의 집권세력에 올 2월은 잔인한 달이다. 총리로 지명돼 무난히 인준 받을 것으로 예상됐던 이완구 후보를 둘러싼 온갖 의혹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의 인준은 불투명한 상태다. 연이은 총리후보 낙마로 리더십에 타격을 받아 온 대통령으로서는 곤혹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법원도 권력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은 판결들을 잇달아 내리고 있다. 지난 대선 때 뜬금없이 터져 나와 논란이 됐던 노무현 정권 시절 남북정상회담 초본 폐기 사건에 대해 법원이 무죄판결을 내린 데 이어 이번 주에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대선개입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했다면 이는 정권의 정통성에 타격을 안겨주는 심각한 사안이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야당의 이런 의혹 제기를 근거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오히려 야당후보의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법원은 정보기관이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입한 것으로 판단했다.
국정원 개혁요구에 마이동풍 식으로 반응하면서 사법부 판단을 지켜보자고 했던 대통령이었던 만큼 무언가 한마디는 해야 한다. 그렇지만 청와대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가끔씩 아무 말도 안 할 자유와 권리를 부여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대변인의 논평이 전부다. 무책임한 태도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남북정상회담 초본 폐기 무죄판결이 나온 후의 침묵은 더 기괴하다. 대선 당시 여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 포기 발언을 했다는 주장과 대화록을 폐기했다는 공세로 정치적 재미를 톡톡히 봤다. 특히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물 타기 하는 데 이것을 교묘히 이용했다. 대통령은 이것을 ‘사초삭제’라고 까지 표현해가며 이슈화시켰다. 보수 언론들이 여기에 가세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포기 발언은 없었으며 폐기혐의도 무죄인 것으로 결론 났다. 그렇다면 당시 대한민국의 이슈는 단지 그것 하나 뿐인 양 난리를 쳤던 당사자들은 사과든 해명이든 무언가 입장을 내놓는 것이 도리다. 하지만 집권세력과 보수언론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흔히들 ‘침묵은 금’이라고 한다. 그러나 침묵은 금이 아니다. 침묵이 진정한 가치를 발하는 것은 다른 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그 순간뿐이다. 입을 열고 말을 해야 할 때 침묵을 지키는 것은 비겁함이다. 주장할 권리가 있다면 그 주장에 책임질 의무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정치판에서는 이런 상식을 찾아 볼 수 없다. 자신에게 유리하다 싶으면 허위사실을 퍼뜨리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정략적 이득이 있다면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천박함이 드러난다. ‘아니면 말고’ 식의 무책임한 태도이자 정상배들의 전형적인 가치관이다.
정치인들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는 완전 바닥이다. 신뢰와 품격을 내동댕이친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여파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정상배들 때문에 나라가 한층 더 분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잘못을 시인할 줄도, 사과할 줄도 모르는 정치인들의 비겁한 침묵을 깨뜨리는 길은 단 하나다. 국민들이 침묵하지 않으면 된다. 침묵이 선이 되는 사회에는 희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