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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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40) 제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3)

2015-01-0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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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환>

잭슨 대통령의 재임 중에 ‘Peggy Eaton Affair’라는 일이 있었는데 여자들끼리의 가십으로 시작된 사소한 말썽이었지만 (그래서 이 사건을 petticoat affair 라고 부르기도 함) 국정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당시 워싱턴 고위 사교계의 일면도 보여 주는 일이 있었다.

테네시 주 연방상원 의원으로 잭슨 이 전쟁부장관으로 임명한 John Eaton은 상처한 사람으로 워싱턴의 한 호텔주인의 (Tavern주인이었다고도 함) 딸로써 미모의 젊은 과부인 Peggy와 재혼하였다. 무명의 30세이었던 Peggy가 갑자기 전쟁부장관의 부인으로 나타나는 것도 거북스러운 일이었을 텐데 그녀의 행동과 언행이 거침없었던 모양으로 이를 아니꼽게 생각한 워싱턴 고위 사교계 부인들의 따돌림을 받게 되었었다.


모든 각료의 부인들이 Peggy를 따돌리기 시작하였으며 Eaton부부는 아주 거북한 사교생활을 하게 되었었다. 이런 얘기들이 잭슨의 귀에 들어갔고 아마도 자신의 미천한 출신 때문에 이런 따돌림에 평소부터 예민해 왔을지도 모르는 잭슨은 Eaton 편을 들게 되었다.

특히 이 말썽의 진원지가 Calhoun부통령의 부인이 라는 점을 알고 나서는 평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부통령과의 관계가 아주 나빠지고 전 각료들과는 대화도 하지 않는 사이까지 되어 버렸다. 한동안 국가대사를 장관들과 상의하지 않고 측근친지 몇 명들과 상의를 해 왔던 탓에 이들 측근들을 언론에서 ‘Kitchen Cabinet’라 불렸다고 하며 이 표현은 지금까지 같은 의미로 쓰이는 정치용어가 되었다.

우스꽝스러운 사소한 일로 정국이 마비되는 현상이 일어나자 눈치가 빠른 Martin Van Buren 국무장관은 자신이 먼저 사표를 내면서 한 장관만 제외하고 전 각료들이 사표를 내도록하여 이 난국이 수습되도록 하였다. 잭슨에게 미움을 받은 Calhoun은 대통령이 되어볼 꿈을 접었어야만 했었고 Van Buren은 잭슨의 두 번째 대통령 재임 시에 부통령을 지냈고 제8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남부주인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정책상의 불화로 연방에서 탈퇴하겠다고 위협하자 잭슨은 40일안에 연방군 5만 명을 보내서 국가반역죄로 다스리겠다고 맞장구를 쳐서 탈퇴론을 중지시켰다.

잭슨은 뿌리 깊은 남부사람이었다. 남부사람이란 의미는 북부사람들을 불신하고 싫어한다는 의미이고 북부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항상 의심을 가지고 본다는 의미이다. 남북의 분열이 점차 더 심각해지면서 어떤 때에는 사리의 잘잘못을 가리기 보다는 북부가 지지하는 사안은 그것만으로도 남부사람들은 반대해야만 한다는 이유가 될 정도이었다.

남부사람들은 공업.금융.무역 등을 주업으로 하는 북부사람들이 농업을 주업으로 하고 있는 남부사람들을 이용하고 착취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북부사람들의 착취과정에서 항상 은행이 앞장서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아마 잭슨의 ‘실정 제1호’는 국립은행 폐쇄와 어리석은 금융정책이었다고 생각 된다. 뿌리 깊은 남부사람인 잭슨도 은행에 대한 편견이 있었던 것 같고 국립은행 의 폐쇄에 이르게까지 되는 그의 일련의 결정들을 보면 그의 금융에 관한 무식, 무지와 편견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금.은 등 실물만 믿을 수 있고 지폐는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여서 한때에는 연방소유 토지 판매 대금을 금.은으로만 지불하도록 한 적도 있었다. 영국에서 들어오던 금이 영국 측 사정으로 조달이 지연되자 미국경제가 즉각 영향을 받았고 한해 미국농산물이 흉년이 들자 미국의 경기는 극심한 불황에 빠지게 되었다.

초대 대통령부터 제6대 대통령까지 미국의 원대한 성장을 위해서는 도로, 운하 등이 건설되어야 하고 국립대학교를 설립해야하고 그런 사업들의 재정지원을 위해서 국립은행 이 있어야 한다고들 주장하였었는데 남쪽사람들은 그런 주장이 옳은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부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하기도 했었다.
잭슨 대통령 때에는 국립은행이 벌써 여러 해 동안 주어진 책무를 잘 수행해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잭슨은 자신의 재임 중에 1836년까지는 법적으로 존속하게 되어있던 국립은행을 문 닫게 하기로 결심하였다.

잭슨은 연방정부의 세수를 관리하고 그 세수를 은행의 자금으로 쓰고 있던 국립은행에 연방자금을 입금하는 것을 1833년에 중단시키고 그 자금들을 군소은행들에 (pet banks) 분산하여 입금하도록 하였다. 국립은행에 남아있던 연방정부의 잔금은 전부 지출되도록 하여서 국립은행의 자금이 고갈 되도록 하였다.

국립은행은 대부규정들이 엄격하여 대부금의 손실이 거의 없었으나 군소은행들은 연방정부의 자금이 쏟아져 들어오자 신용등급을 자세히 조사하지도 않은 채 마구 대부를 해 주었다. 군소은행들이 지폐를 남발하여 화폐교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도는 돈이 늘어나자 부동산투기들이 성행하여 땅값들이 막 오르기 시작하였고 급기야는 대부금 손실이 사방에서 막 터져 나왔다.

국립은행은 결국 문을 닫았고 잭슨 임기 말쯤 되어 서는 화폐가치가 떨어지며 대경기불황이 일어난 채로 잭슨은 임기를 끝냈고 후임 Van Buren 대통령은 경제부활을 위해 정신이 없다가 재선에 참패 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잭슨의 전횡을 비난하던 사람들이 잭슨을 ‘Andrew 왕 1세’라고 비꼬았다고 한다. 잭슨의 대통령 재임 기간 중에 국제적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던 것은 신생 약소 미국으로서는 천행이라고 생각된다. 잭슨은 작은 도전에도 타협 없이 미국을 전쟁으로 몰아갈 수 있었던 성품이었던 까닭이다. 한 나라의 운명이 정치지도자의 경륜과 성품, 능력에 의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증거를 앤드류 잭슨의 통치역사에서 배우게 된다.

Peggy Eaton Affair는 미국 역사에 남긴 큰 여파만 없었다면 한때의 가십거리로 끝났어야할 단순한 얘기이다. Peggy는 과연 미국 판 ‘경국지색’이었을까? 역사상 가끔 ‘경국지남’들도 없지는 않았는데 유독 경국지색을 죄악시 하는 것은 지난날들이 남성 우월 주의적 시대이었기 때문이 라고 생각된다.

양귀비나 조선귀비들이 꼭 ‘미스 차이나’나 ‘미스 코리아’가 될 정도의 미인들은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적당한 미모를 가진 여성들이었으나 최고실력자 의 주변을 맴돌다가 보니 때로는 본의 아니게 역사가 조금 바뀌었을 뿐인지도 모를 일이다.

■ Margaret O’Neal (Peggy Eaton)이 어떤 여자이었을까에 대한 자세하고 분명한 기록은 없는 듯하다. Peggy에 대해서 Wikipedia가 종합한 내용을 아래에 적으면서 독자들이 각자 그녀를 판단해 보시기 바란다.

Pegg 는 열일곱 살이 되던 1816년에 스물두 살이나 연상인 39세의 해군군인 (계급미상)과 결혼해서 아버지가 사준 집에서 부부가 정치인들과 친교하며 지냈는데 1818년에 Eaton 의원과도 알게 되고 결혼한 지 12년이 되던 1828년에 4년 계약으로 지중해에서 여객선 사무장으로 일하던 남편이 갑자기 사망하였다.

이듬해인 1829년 초에 Peggy는 상처로 독신중인 41세의 Eaton상원의원과 재혼하였다. 재혼 후 경험한 따돌림의 원인에 대하여 Peggy는 “나는 활기찬 젊은 여성으로써 행동했을 뿐 특별히 잘못한 일이 없었다. 아마 나를 질투했던 여자들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회상하였다 한다.

그런데 그녀가 재혼하기 전에 Eaton의원과 정사를 하였고 그 문제로 고민하던 전남편이 자살한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Peggy는 각료들의 부인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기 시작하였다. 과연 Peggy는 미국판식 ‘경국지색’이 아닌가!

Eaton과 사별한 Peggy는 59세 때 19세인 이태리인 음악가.댄스교사와 결혼하였으나 7년 후에 젊은 남편이 Peggy의 재산을 훔쳐가지고 Peggy의 17세 된 손녀딸과 함께 유럽으로 도주하였다. Peggy는 이 남편과 이혼을 하였으나 잃어버린 재산은 회수하지 못하였고 말년에는 경제적으로 빈궁하게 살다가 여든 살에 타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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