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환>
앤드류 잭슨은 여러 가지 성격상의 약점들을 가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굽힐 줄 모르는 자존심, 결투를 해서라도 명예를 지키고자 했던 전통적 “남부신사도,” 마음먹은 것은 꼭 이루고자 하는 강한 결단성 등을 가졌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의 일생 경험과 일화 등을 보면 이런 성품들이 나타난다.
잭슨의 양친은 Scot-Irish 사람으로서 Ireland 에서 아주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미국에 이민을 왔다. 잭슨의 아버지는 이민을 와서는 독립군에도 협조하였으나 불과 2년 만에 잭슨이 유복자로 태어나기 3주전에 29세의 나이에 사고로 사망했다. 어머니는 홀몸으로 세 아들들을 양육하였는데 잭슨 의 큰형은 십대 말에 독립군으로 참전하였으나 열사병으로 병사했다.
잭슨은 13세 때에 둘째형과 함께 독립군의 전령으로 참전하였다가 형과 함께 영국군에 포로가 되어 혹독한 포로생활을 하였다. 포로 생활 중 영국군장교의 구두를 닦으라는 명령을 거부하다가 그 장교의 칼에 머리와 손을 맞아 평생 그 흉터를 몸에 지니고 살았다. 어머니가 두 아들들을 영국군으로 부터 석방 시켰으나 잭슨 의 형은 홍역으로 곧 사망하였다.
홀어머니는 미국 측의 병원선에서 자원봉사를 하다가 콜레라에 걸려 잭슨이 열네 살 때 세상을 떠났다. 천애의 고아가 된 잭슨 은 이때부터 자신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 영국에게 있다고 확신하였으며 극도의 대영적개심을 품게 된다. 그는 제대로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였고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런 까닭이었던지 그는 SPELLING에 서툴었다고 하며 “사람은 한 단어를 한 가지 이상으로 spelling 할 줄 아는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고 농담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독학으로 스무 살 때 변호사가 되었다. 그는 후일 테네시 주로 승격하는 미국영토에서 이 도시로써 형성되어 가는 시기부터 극성스럽게 활약했다. 다른 변호사들처럼 명문집안의 후원이 없었던 잭슨은 남보다 억척스럽게 뛰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가 맡았던 변호사 일들에는 폭행사건들과 부동산 거래, 투자 등에 관한 일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일찍이 부동산에 눈을 뜨게 되었던 모양인지 그는 부동산 투기도 하였었으며 General Store도 열었고 젊은 나이에 노예 100명을 소유하는 650 에이커의 면화재배 대농장주가 되었고 종국에는 1,000 에이커에 노예 300명을 거느린 남부귀족이 되었다. 다른 농장주들보다 노예들의 처우를 잘해주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노예주의자이었을 것이다.
그는 임신한 노예가 출산을 하도록 허락 하였다고 하는데 노예의 자식은 자동적으로 주인의 노예가 되는 것이므로 그의 노예 출산 허락은 꼭 인도주의적이었다가 보다는 이기적인 동기에서 허락했던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식량의 자급자족을 위해 노예들에게 총과 칼을 주어서 사냥을 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는 테네시가 주로 승격하기전의 미국영토정부의 검찰국장을 지냈으며 아주 젊은 나이에 이미 네쉬빌의 유지가 되어서 테네시가 주로 승격한 후 제헌의원으로 선출되어 테네시 주헌법을 쓰는데 참여하였다고 한다. 테네시 주 대법원 판사를 지냈고 초대 연방하원의원이 되었으며 상원의원도 되었다. 그는 성격이 저돌적이었으며 정치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법규쯤은 가끔 무시하였던 듯도 하다.
군 경력이 없던 사람이 테네시 민병대의 대령으로 입대하여 민병대사령관이 된 후 끈질기게 미국 원주민들을 토벌하고 다녔었다. 뉴올리언스에서는 영국군을 섬멸한 후 자기에게 권한도 없는 계엄령 을 선포하여 잠정적인 군정을 하였으며 플로리다의 Seminole 인디언을 토벌한 후 대통령의 허락도 없이 슾 기지들을 점령하여 국제문제로까지 확대될뻔 하였으나 그 사건을 계기 로 하여 종국에는 미국이 플로리다를 거의 공짜로 스페인으로부터 사들이게도 되었었다.
잭슨은 여러 무공 들이 인정되어 미국 육군소장에 임명되었다. 자신이나 가족에게 모욕을 준 사람과 결투하는 관행이 아직 건재하고 있었던 때인데 찰스 딕슨이라는 변호사가 “잭슨의 부인은 중혼 (bigamist)한 여자이다” 라고 얘기했었는데 그 말은 사실이었다고 한다.
잭슨은 39세 때이던 1806년에 그 사람에게 결투를 청했다. 결투장에서 상대방이 먼저 쏜 총알에 맞은 잭슨은 꼿꼿하게 서서 침착하게 상대방을 정조준 하여 총을 쏘았고 상대방은 그 다음날 사망하였다. 잭슨 은 느슨하게 입고 있던 오버코트가 1차 방패역할을 해주었는데 다행히 심장 옆으로 총알을 맞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부인 레이첼은 먼저 타계하여 1828년12월25일에 매장되어서 그 다음해 3월에 있었던 잭슨 의 대통령 취임식을 보지 못하였다. 잭슨이 단행한 개혁들 중에 가장 논쟁과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엽관제도’ 라고 잘못 번역되어 오고 있는 ‘Spoils System’이다.
필자가 알기로는 우리나라 전래의 엽관제도는 주로 ‘뇌물을 바치고 벼슬을 얻는 매관매직’을 의미했던 까닭에 잭슨 의 Spoils System 과는 엄밀한 의미에서 다른 제도이고 어느 시대에서나 부정한 관행이었다.
원래 “Spoils” 라는 단어는 “전리품” 이라는 군대전통의 용어인데 “To the victors the spoils belong”라는 구호를 불러가며 전리품을 참전 군대들과 황제가 반분하여 세계 최강의 군대를 만들었다는 로마시대와 그 이전부터 있어온 군대의 전통이다. 지금도 지구 어느 지역의 전쟁에는 예사로 일어나는 관행이다. 예나 지금이나 또 어디서나 금지 되어야할 관행이다. 그런데 이런 나쁜 전통을 가진 “전리품제도”가 잭슨 대에 이르러서 “개혁”이라는 갑옷을 입고 미국정치에 등장했던 것이다.
잭슨은 다소 무지한 서민 대통령답게 “모든 공직은 매우 단순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나 임명만 해놓으면 해낼 수 있는 일이다” 라고 취임 초에 말하였다. 그때의 공직들이 비교적 단순했었고 비 전문화되어 있었다는 점으로 볼 때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잭슨 은 그런 허점을 잘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잭슨 이전의 대부분의 대통령들도 취임하고 나면 “부패공무원척결”이라는 아름다운 명분을 걸고 대폭적인 물갈이들을 해왔었다. 잭슨 은 그의 저돌적이고 막무가내적인 성격답게 종래의 관행을 “떳떳하게 아름다운 이름으로 제도화”한 것뿐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는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처럼 새 대통령의 정책을 차질 없이 집행해 나가기 위해서는 새 대통령의 심중을 읽는 사람들이 공직을 맡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전임 애덤스 대통령사람들은 다 나가 달라는 말이었다. 역시 전통대로 부패와 무능척결 이란 명목으로 우정성 직원들을 많이 물갈이 하였고 다른 부처들에서도 물갈이가 많이 있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잭슨 재임 8년 동안 전체공무원의 6분지1을 교체하였는데 이 비례는 전임 대통령들과 비슷한 것이라고 한다.
결국 전임 대통령들이 해오던 관행을 자기 대에 와서 큰소리로 떠들어가며 한 것뿐인데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Spoils System을 “정식으로 제도화” 시켜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잭슨은 미국원주민들에 대한 미국의 원죄가 더욱 가혹해지도록한 사람임은 분명하다.
필자는 잭슨 이 노예주의자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는 미국원주민들에 대해서는 극심한 인종차별 주의자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는 백인 (미국인)들과 미국원주민은 같은 장소에서 공존할 수 없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던 탓에 “The best place for Indians is somewhere else!” 라고 공언하고 다녔던 사람이다.
그의 ‘무공’이라는 것의 대부분은 원주민토벌이었던 잭슨은 대통령이 된 후에도 미국내 사방의 원주민부족들과 94개의 Treaty를(원주민부족들을 독립국가로 인정해서 국회의 비준까지 받은 “국제조약”) 맺으면서 미국원주민들의 땅을 합법적으로 빼앗기 시작하여 곳곳에서 원주민 토벌전쟁을 하며 원주민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살해하였다.
대통령 취임 2년후 에는”Indian Removal Act of 1830” 이라는 법을 만들어 미전국 ,특히 동남부와 중부에 있는 원주민들을 지금의 Oklahoma 주로 강제 이송시켰다.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Cherokee Indians 만도 6천명이었다고도 함) 원주민 들이 1,200 마일이나 되는 육로와 수로 등의 “Trails of Tears (눈물의 추방길)” 에서 죽었고 원주민들의 저항운동은 미약해 질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마 지금도 미국 사람들 중에는 이 잭슨의 원주민학대를 그의 치적 중의 하나로 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미국에 사는 약소민족들이 쉽게 넘겨버릴 수는 없는 미국역사의 얼룩진 한 페이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