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천루 속 올곳이 자리한 프랑스 중세 사원
조지 그레이 버나드 유럽서 갖고 들어온 컬렉션 확대 개편
1930년 존 라커펠러 주니어 토지.일가 소장품 기증
매 계절마다 콘서트.연주회 등 빈번하게 개최
여유로이 하루 보낼 수 잇는 최적의 휴식처로 유명
날씨 좋은 날 지하철 A 라인을 타고 190번가 역에 내려, 신록이 우거진 포트트라이언파크의 산책로를 거닐어보자. 맨하탄의 최북단, 게다가 허드슨강을 내려다보는 고지대에 자리한 이 공원은, 휴일이면 나들이 나온 가족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비곤 한다.
시끌벅적 떠들어대는 아이들의 고성과 단란한 가족들의 모습에 편안함을 느끼며 7분여를 걷자, 저 멀리 ‘마치 중세 사원 같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이것이 MET의 분관이라 할 수 있는 ‘클로이스터 (The Cloister) ‘다. 클로이스터는 영어로 ‘수도원(의 회랑)’이란 의미를 갖는데, 실제 이 건물의 일부는 프랑스의 수도원 세인트 미셀 드 퀵사나 세인트 길렘 등 다양한 중세 유물들이 활용되고 있다.
■버나드와 라커펠러 일가의 인연
원래 클로이스터는 조각가 로댕의 제자인 조지 그레이 버나드가 유럽에서 갖고 들어온 컬렉션을 확대 개편한 게 시초였다. 시카고에서 조각을 공부한 뒤 파리에서 유학한 그는, 한때 ‘바르비종파의 성지’와도 같은 퐁텐블로숲에 거주했다.
이 시기 프랑스 각지에 남은 중세 종교 건축의 일부와 조각품들을 수집하는 데 열중했던 그는, 1914년 이 컬렉션을 대거 뉴욕으로 가져왔던 것이다. 참고로 그가 컬렉션을 뉴욕으로 가져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의회는 ‘역사적인 건축물의 해외 반출을 금지하는 법안’을 채택했다.
또한 클로이스터는 라커펠러 일가와의 남다른 인연으로도 유명하다. 당초 이 일대의 토지가 바로 존 라커펠러 주니어의 소유였던 것이다. 이후 1925년 MET이 버나드로부터 소장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하면서 그 인연이 시작되었다. 게다가 1930년에는 해당 토지까지 전부 기증해 현재의 클로이스터가 완성될 수 있게 한 라커펠러는 일가 소장품까지도 다수 기증했다.
■미국 문화의 성립 과정을 드러내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기는 궁금증 하나, ‘왜 프랑스 중세 사원이 대서양 건너 미국에 자리한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프랑스 혁명(1789-1794년)과 관련된 시대 배경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원래 프랑스 혁명은 민중들이 구체제에 대해 촉발시킨 항쟁으로, 그 결과 구왕권이나 부를 독점하던 귀족, 탐욕에 찬 교회는 극도로 황폐해졌다. 당시 특권적 지위를 구가하던 교회들은 사분오열 되어 매각되는 사례까지도 빈발했다. 이로 인해 버나드는 20세기 초 세인트 미셀 드 퀵사에서 분리된 부분을 사들여, 이를 미국 뉴욕에 화려하게 부활시켰던 것이다. 이렇듯 유럽 각지의 문화재를 반출해 와 이를 그대로 복원, 조합시킨 ‘미국의 문화적 양태’는 이 지점에서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곳에서는 매 계절마다 콘서트나 연주회 등이 빈번하게 개최되고 있다. 특히 전문 아티스트뿐 아니라 아마추어들도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이벤트는, ‘단순히 보는 것 이상의 즐거움’을 충분히 누릴 수 있게 한다.
사실 이 일대는 인근 포트트라이언파크와 더불어 여유로이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최적의 휴식처로도 유명하다. 번잡스러운 맨하탄의 일상에서는 쉽사리 느낄 수 없는 정숙함과 자연, 그리고 허드슨강의 웅장한 경관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라 할 수 있다. <이수형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