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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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35) ‘몬로주의’

2014-12-0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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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열강 앞에 내놓은 미국의 도전장

<조태환>

몬로 대통령의 재임 중에도 대법원장으로 있던 존 마샬이 이끌던 연방대법원은 대여섯 가지의 대법원 판례로써 연방정부의 상위성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관계, 연방대법원과 주 대법원 과의 관계에서), 연방정부의 권한확대, 대법원의 최종판결권, 연방정부의 상업(commerce) 통제권의 확대해석 (원래는 연방정부에는 주 간의 통상만 통제할 수 있다고 헌법에 규정되어있는 것으로들 생각했음)등으로 그 후 전신, 전화, 오일 파이프라인 통제 등을 연방정부가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헌법의 광의해석으로 국가단결이 더 쉽게 가능 하도록 하였다.

몬로 대통령은 국내정치는 국회에서 입법을 통해서 해야 하고 대통령은 법 집행자에 불과하며 외교는 대통령이 주관해야할 사항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의 재임 중에 이뤄 놓은 몇 가지의 업적을 얘기하고자 한다.


미국과 영국은 미국 국무장관서리 Richard Rush와 주미 영국공사 Charles Bagot이 협상하였던 까닭에 Rush-Bagot Agreement 라고 불리는 협정을 1812년 미영간의 전쟁 끝에 1817년에 협정하였는데 미국과 캐나다간의 국경선을 확정시킨 것이었으며 그 다음해인 1818년의 Rush-Bagot Treaty가 조인되고 상원의 비준을 받았다.

이 조약으로 미.영 양국은 향후 10년간 Oregon Territory를 공동점유하기로 하였고 미국과 영국은 5대호와 챔플레인 호수에 경무장한 100톤급 이하의 해군함정 한척씩만 보유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선에 있는 국경경비대는 무장을 하지 않기로 약속하였다. 이 조약은 지금까지 충실하게 지켜지고 있어 이 국경선은 세계 최장의 비무장 국경선 이라고 한다. 49도선이 국경선으로 되었고 미국은 오른편으로 대서양을 왼편으로 태평양을 접하는 나라가 되었다.

몬로 대통령의 재임 중에 일어난 다른 역사적인 일은 플로리다 영토의 취득이다. 법적으로는 플로리다를 스페인으로부터 구입한 것이었는데 필자가 ‘취득’이라고 부른 것과 이 땅덩어리의 구입을 꼭 몬로의 업적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아래와 같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그분에 대해서 곧 읽게 될 것이지만 미국 제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 장군은 무공을 많이 세워서 그 여파로 결국 대통령까지 된 사람이지만 원래부터 직업군인은 아니 었다. 그는 대통령이 된 후 미국 원주민들에게 미국 역사에 남을 정도로 몹쓸 짓을 한 사람이었는데 거의 신앙적으로 “The right place for Indians is SOMEWHERE ELSE”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인종차별 중에서도 특이한 것이었는데 “미국사람들과 원주민들과는 같은 장소에서 공존할 수 없다”는 신념이었다.

우리가 이미 아는 것처럼 그는 1812년 미.영 전쟁이 끝난 후에 뉴올리언스에 온 영국군을 아주 통쾌하게 섬멸시켜서 하룻밤 사이에 미국 국민들의 숭앙을 받는 장군이 되었는데 만일 이 전투에서 미국 측이 패배하였더라면 잭슨 장군은 ‘무단자의 행위죄’로 군법회의에 기소 당했었을 것이다. 그는 탁월한 전략을 쓸 줄 아는 용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주장이 강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잭슨 장군은 뉴올리언스 전투 이전에도 테네시 주의 민병대장으로써 미국 원주민 토벌 작전에 공로가 많은 사람이었는데 1818년에는 플로리다 서남부의 미국 개척민들을 공격해온, 미국 원주민들 중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저항력이 강했던 Seminole Indian들의 토벌작전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원주민들을 다 손봐준 후에 기왕에 나선 김에 국력이 약해진 스페인 점유의 동부 Pensacola와 St. Marks까지 점령해 버렸다.

이 과정에서 미국 원주민들에게 무기를 공급 해준 것으로 의심되는 영국인 두 명이 사살되었다. 사태가 국제문제로 전개되어 미국이 영국과 스페인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는 사태가 발발한 것이었는데 몬로 대통령은 자신이 스페인령 지역을 점령하라고 지시한 적이 없다고 발뺌하였으나 잭슨 장군은 대통령의 지시로 침공했다 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잭슨 장군을 징계해야 한다는 각료들의 의견도 있었으나 몬로 대통령은 애덤스 국무장관의 제의를 받아들여 잭슨 장군을 지지하기로 결정하였다. 몬로 대통령은 이 혼란스런 위기사태를 잘 이용했던 것이다.


미국은 스페인에게 1. 플로리다에 있는 원주민들을 제대로 통치해서 미국사람들을 공격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던지, 2. 아니면 플로리다를 미국에게 500만 달러에 팔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남미 식민지들의 통제가 힘들어서 플로리다 원주민들을 통제할 능력이 없었던 스페인은 미국과의 전쟁 끝에 플로리다를 공짜로 빼앗기는 것 보다는 500만 달러라도 받고 파는 것이 났다는 결론을 내렸다.

양국 간의 협상 끝에 1. 미국은 텍사스(원래 자국 땅도 아니었던)와 캘리포니아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고, 2. 스페인은 미국 Northwestern Territory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며,3. 스페인은 미국에게 500만 달러에 플로리다를 판다고 타협이 1819년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 전부터 미국의 무역상들과 해운업자들은 나폴레옹과 스페인이 전쟁을 할 때 해상봉쇄, 해상약탈 등으로 입은 손해 500만 달러를 스페인이 보상하라고 주장해오고 있었다. 미국은 스페인에게 이들 보상요구액 500만 달러를 대납해주는 것으로 스페인에게 주어야할 대금 500만 달러를 상쇄하겠다고 하였다. 자국국민에게 500만 달러를 지불함으로 스페인에게 줄 500만 달러를 완납한 것이었다. 결국 공짜로 플로리다를 산 것이다. 꿩을 잡고 보니 알이 있어서 ‘꿩도 먹고 알도 먹어버린 것’이었다.

영.불.스페인의 세력다툼과 새 식민지 쟁취경쟁에서 미국은 계속 시달려 왔다. 남북미대륙이 이들의 불화의 원인이 되었고 미국도 혹시 그들 불똥이 자국에 튈까봐 걱정이었다. 미국의 독립에 영향을 받은 남미의 스페인 식민지들이 독립을 하려는 움직임이 생기기 시작하자 미국은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러시아 등의 유럽강국들이 스페인을 무력으로 도와서 식민지들의 독립을 저지하려 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그 무렵 영국의 외상이 불란서와 스페인이 남북미대륙을 침범하는 경우에 영국이 좌시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도를 발표하였다.

외교전문가인 퀸시 애덤스국무장관의 제안을 받아서 몬로 대통령은 1823년 12월 3일 국회에 보낸 연두교서에서 ‘몬로주의(Monroe Doctrine)’를 발표하였는데 그 주요 골자는 “앞으로 미국은 유럽의 문제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니 유럽제국도 남북미대륙 (Western Hemisphere 라는 용어를 썼었는데 유럽이 가운데에 표시되는 세계지도에서는 남북미대륙이 서반구로 보이는 까닭) 문제에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남북 미 어느 나라라도 침공을 받으면 미국은 자국이 침공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고 대항할 것이다” 고 땅덩어리만 컸지 아직은 속빈 강정 같은 신생국가가 유럽열국을 상대로 간이 큰 소리를 내었던 것이다.

영국을 등에 업고 해본 소리이기는 하지만 유럽열국들도 영국이 몬로 선언의 배후에 있음을 감지하였고 무엇보다도 이 선언은 미국사람들의 자신감과 자부심을 북돋아준 것이었다. 미국사람들은 1812년 미.영 전쟁의 승전으로 고개를 쳐들고 처음 미국사람으로서 자랑스러움을 느끼기 시작하던 때이었다.

어쨌든 남미의 모든 식민지들이 줄지어서 독립을 하여서 마치 몬로주의가 큰 영향을 준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이미 1822년에 미국은 남미의 신생독립국을 모두 인정한다고 발표 하였었는데 이제는 미국이 그 독립들을 보장하겠다고 나선 격이 되었다.

몬로 대통령은 오랜 공직생활 중에 개인적인 부채가 상당히 늘어나서 은퇴 후에는 재산도 팔아야 했으며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1831년 7월 4일에 73세로 심장병과 폐병으로 사망하였는데 이날은 미국 독립선언 5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는 존 애덤스와 토마스 제퍼슨에 이어 세 번째로 독립선언 일에 사망한 대통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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