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 아침의 시

2014-11-25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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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그 노래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아주, 아주, 오랜 옛날 월동쪽 용궁 남쪽 황룡사 구층목탑 그늘에 기대어 서서 그대는 노래를 들려 주겠다 약속하였지만 아직 그 노래 듣지 못했습니다. 이제 탑도 사라지고 절과 사직도 사라져 고즈넉한 가을 절터와 당간지주만 남아 쓸쓸한데 돌 속에 묻혀서도 속절없이 천 년 신라 쪽으로 열려 있는 눈과 귀, 그대 언제쯤 서라벌에서 부는 바람 편에 안부와 주소가 적힌 길고 긴 사랑의 편지 보내주시겠습니까, 그 편지 받으면 비파암 지신 석가께서 낮잠에 드는 봄날 오후, 바위 위에 벗어둔 가사 슬그머니 훔쳐입고 그대 만나러 저잣거리로 내려가겠습니다. 내려가 그리운 그대 노래 한 소절만 들을 수 있다면 다시 돌 속에 잠겨 흘러갈 오랜 잠이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 노래 허리에 띠로 감고 앉아 또 한 천 년 무작정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 정일근 (1958- ) ‘경주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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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천 년의 사랑이 있습니다. 저 옛날, 어느 처자의 연인이 있어 천 년 바람에 불려가는 무량의 연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방대한 스케일의 서정성을 지닌 참 아름다운 연가입니다. 이 시가 매혹적인 것은 아마도 튼튼한 허무의 미학 때문일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무작정 자유로운 사랑의 건강한 허상 때문일 것입니다. 찰나인 인연 뒤에 이처럼 큰 허무의 꽃이 피어날 수 있다면 혹시, 사랑이 영원한 것이라고 말해도 되겠는지요.

임혜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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