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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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33) 1812년 제2차 미.영 전쟁(2)

2014-11-1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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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813년 9월에 Erie 호수에서 Olivier Perry (주*)가 이끄는 미국해군이 영국해군을 완전 제압하자 미국육군의 수송이 쉬워졌고 디트로이트 등 네 곳을 점령했던 영국군의 보급이 차단되어 그들이 캐나다로 철수할 수밖에 없도록 되었다. 나폴레옹이 영국에 참패하고 Elba 섬으로 귀양을 가게 되자 영국은 1814년 8월 14일에 군대 15,000명을 체사픽만에 상륙시켰는데 그중 4천명이 미국 민병대를 가볍게 물리치고 워싱턴을 점령했다.

그전 해에 미군들이 캐나다 토론토의 York를 방화한 보복으로 영국군들은 미국 국회 의사당과 몇 곳의 공공건물들에 불을 지른다. 1814년 8월 24일 에는 대통령관저에 불을 질러 내부를 전소시켰다. 그 후 재건된 대통령관저는 불에 탄 거스름을 덮기 위하여 흰 페인트를 칠하였고 이때부터 대통령관저는 비공식적으로 ‘The White House’라고 불리다가 1901년 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이 백악관의 Letterhead 에 찍혀 있던 ‘The Executive Mansion’을 ‘The White House’ 로 바꾸면서 공식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이 영국군 4천명은 또 볼티모어를 점령하고자 갔었으나 미국 측의 강력한 저항을 받아 점령에 실패하고 사령관도 전사한 채 Chesapeake 만에 있던 영국군함으로 철수 하였다. 영국군함들은 캐나다로 후퇴하기 전에 앙갚음으로 9월 13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볼티모어의 미군요새 Fort McHenry 를 밤새 함포사격 하였다. 이 처참한 함포사격을 직접 목격한 미국 Key 변호사가 14일 새벽에 그때까지 끄떡하지 않고 펄럭거리는 미국국기를 보고 미국국가를 작사한 일화에 대해서는 다음호에 쓰고자 한다.


영국은 다시 군대 14,000명을 캐나다에서 내려 보낸다.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에 있는 Champlain 호수 옆으로 내려오던 이들은 도중 사방에서 미군의 습격을 받았었다. 설상가상으로 열세로 보이던 미국해군이 Champlain 호수에서 영국해군을 완전 섬멸해 버리자 영국군은 보급로가 다시 막히어 결국 캐나다로 철수하게 되고 미영 제2차 전쟁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다. 드디어 미.영 간에 1814년 12월 24일 벨지움의 Ghent에서 모든 것을 원상 복구한다는 내용의Ghent 조약이 협상되었다. 미국 상원은 1815년 2월 14일 이 조약을 비준한다.

통신수단이 아직 원시적이었던 시절인지라 평화협정이 체결된 것도 모르는 영국군 7,500명이1815년 1월 5일에 뉴올리언스를 점령하려 왔었으나 테네시 민병대, 흑인군인들, 해적 등을 이끌고 온 앤드류 잭슨 장군 (후일 대통령) 의 기습을 1월 8일에 받아 불과 30분간의 전투에서 영국군 사령관과 두 장군이 전사하고 2천명의 사상자가 났었다. 미국 측은 13명이 전사, 58명이 부상 혹은 실종되었다. 미국은 정세파악도 하지 못한 채 무리하게 시작한 전쟁으로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었으나 이 전쟁의 결과로 미국은 더 강해지고 자랑스러워 졌으며 국가적인 단결이 더 잘 되었다고 한다.

공업과 통상이 주 생업이었고 남부 주들보다 더 부유했던 뉴잉글랜드 지역은 1812년 미영전쟁을 반대하여 천백만 달러에 이른 전쟁비용 중 백만 달러만 부담하였으며 전쟁 중 캐나다 에 있던 영국군에게 소고기도 팔았으며 군대도 제대로 동원하지 않았고 병력을 자기네 주들만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용하였고 미합중국에서 탈퇴하자는 주장까지 하였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뉴잉글랜드 지역이 비애국적이라는 비난도 거세졌으며 Federalist 당의 지지도가 떨어졌으나 국가단결의 열성은 더 강해졌다고 한다. 영국 신문들이 ‘보잘것없는 나라’라고 얕잡아 불러오던 신생국이 외부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당시의 세계 최강국 영국을 굴복시킨 것이다.

미국은 엄청난 자부심을 느꼈을 것이고 나라로서 자신감을 얻었을 것이다. 미국은 캐나다를 손쉽게 점령해 버릴 수 없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영국은 그 이후로 무력으로 미국을 위협하는 행동을 하지 않게 된다. Madison 대통령은 막대하게 증가된 국가채무를 갚기 위해 무역 관세를 대폭 늘여 미국의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으며 국가 채무감소, 1911년에 폐쇄된 국립은행 재건, 도로와 운하건설 등 국가 간접투자에 관한 시의적절한 법률 등은 어리석게도 파당적인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 하면서 8년간의 대통령 임기를 끝내었다.

1812년 미.영 전쟁 때의 “비애국적”인 행동들 때문에 Federalist 당의 지지도는 급강하 했다. Federalist 당은 정당으로서는 마지막으로 1816년 대통령선거에 뉴욕주 출신 Rufus King을 대통령후보로 내놓았으나 Madison 대통령의 국무장관이었던 버지니아주 출신의 James Monroe가 선거인단 투표의 80% 이상을 받으면서 쉽게 당선되어 ‘버지니아 왕조’는 8년간 더 계속되게 된다.

그는 독립 전쟁 때에 뉴저지주 Trenton 전투에서 어깨에 총상을 입었던 미국의 Founding Fathers 중 마지막으로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버지니아를 대표한 대륙의회 의원이었는데 새 헌법이 중앙정부에 너무 많은 권한을 준다고 해서 반대를 했다. 그는 버지니아 연방상원의원, 주지사 등을 지냈으며 1803년에는 제퍼슨 대통령의 특사로써 나폴레옹으로 부터 Louisiana Purchase 의 제안을 받아온 사람이며 1812년 미.영 전쟁 때에는 Madison 대통령의 국무장관과 전쟁부 장관을 지내고 외교경력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미국의 흑인노예들이 아프리카로 돌아가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 중의 하나이었으며 그 무렵 구성된 The American Colonization Society 는 해방된 흑인노예들이 서부 아프리카에 이주하도록 도와주었으며 이들 전 미국흑인노예들이 드디어 1847년에 Liberia 공화국을 건국하고 미국헌법을 바탕으로 한 새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들은 수도의 이름을 Monroe 의 이름을 따서 Monrovia 라고 불렀다.


■주* Lake Erie 의 미영해군간의 전투에서 미국해군을 지휘하였던 Oliver Perry 의동생인 Matthew Perry는1815년 미 해군의 북부 아프리카 Barbary 해적소탕 작전에도 참전하였고 그 후 미 해군의 중요해군전투에 계속 참전해 오다가 1854년에는 해군준장으로써 네 척의 군함을 지휘하는 함대 사령관으로 일본 동경만에 들어가 일본을 미국의 무역에 강제 개항시켰다. 이무렵 서방제국들에게 강제로 문호를 개방 당하게 되었던 일본은 서구문명을 부득이하게 받아드리게 되었지만 그 결과로 동양에서 제일 먼저 근대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Perry 제독함대의 군함을 타고 온 총각 Pinkerton 해군 대위가 일본 현지처 기생 초초상(나비부인) 과 벌린 불륜한 외도행각을 그린 불란서인 원작 소설이 연극화 된 것을 런던의 한 극장에서 보고난 후 푸치니는 1904년에 초연된 ‘Madam Butterfly’라는 비극적 오페라를 썼는데 그것은 배경이 일본으로 된 19세기판 ‘미스 사이공’이다. Pinkerton은 가상적 인물이지만 오페라에 그려진 일본의 문화와 시대적 상황은 당시의 일본의 실상과 많이 비슷하다고 한다.

특히 원작소설에는 현지처가 package로 포함된 집을 999년간 임대해 준 것으로 되어 있어서 서양인들에게는 충격적이며 야만적인 관행으로 보였겠지만 독자들의 비상한 흥미를 돋구어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천치바보이다 싶을 정도로 자신의 처지 분간도 못하고 열녀 같은 짝사랑을 한 초초상의 비련의 순애보를 푸치니 특유의 선율에 실어놓아 ‘나비부인’은 지금까지 다섯 번째로 청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오페라가 되었다.

한편 조선에서는 60년간의 안동 김씨들 세도아래서 강화도령 철종(1849-63)이 문란한 국정과 부패를 막아보고자 애를 쓰고 있었으나 1853년에 있은 대기근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수습하기 어려운 민란이 계속 되고 있었다. 세도세력들에 의해서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다는 철종은 술과 궁녀들과 문란한 생활을 하다가 재위 13년 만에 서른세 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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