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국서 뜨는 ‘계’

2014-11-07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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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사회 초기 ‘계’는 이민생활 정착에 상당한 경제적 기여를 했다. 계를 하면 제도권 금융을 이용하는데 따르는 절차와 비용부담 없이 비교적 수월하게 목돈을 쥘 수 있어 사업자금이나 결혼자금 등이 필요한 사람들 사이에 크게 유행했다. 또 현금거래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세무당국의 눈을 벗어나 목돈을 만들어 가는데 계를 많이 이용한 것도 사실이다.

멤버들 간의 신뢰를 기초로 하는 계는 근본적인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상당수 한인들이 계에 가입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계가 단순히 사금융의 역할을 넘어 친목과 사교라는 사회적 기능을 해 주기 때문이다.

뉴욕지역 한인 네일업계를 중심으로 수년 간 계모임을 연구한 사회학자 오중환 교수는 “계가 단순한 목돈 마련 외에 이민생활 적응을 돕는, 보다 광범위한 차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특히 계모임이 가정 일에 매달려야 하는 여성들에게 사교활동의 장이 되고 있으며 심리적 안정감을 얻게 하는 역할까지 한다”고 지적한다.


오 교수의 이런 지적을 입증해 주듯 한인사회에서는 10년 이상 지속돼 온 계모임을 심심치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20여 년 째 멤버 변화도 거의 없이 유지돼 오고 있는 계모임까지 있을 정도다. 멤버들 모두가 이미 경제적으로 안정됐음에도 오랜 시간 쌓아 온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계모임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 시대에 접어들면서 한국과 한인사회에서 전통적 방식의 계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가운데 미국에서는 오히려 계와 유사한 사금융이 점차 인기를 끌고 있다는 뉴스다. 살인적인 은행수수료와 체류신분 등 때문에 은행구좌를 갖기 힘든 사람들을 중심으로 ‘RoSCA’(rotating savings and credit association)이라 불리는, 계와 비슷한 금융 품앗이가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주로 라틴계 사이에 인기인데 10~15명이 매주 일정액을 모아 한 명에게 몰아주는 방식이다.

미국사회에 계와 비슷한 개념을 처음 소개한 사람은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이다. 기어츠가 소개한 것은 인도네시아의 ‘아리산’(arisan)이다. 아리산은 멤버들이 한 달에 한 번 꼴로 돌아가며 집에서 모임을 갖고 모은 돈을 집 주인에게 주는 대신 주인은 이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인도네시아 풍습이다.

이렇듯 계와 유사한 금융방식은 오래전부터 각국에 존재해 왔다. 한국은 물론이고 인도네시아, 인도, 중남미, 카리브 국가들, 심지어 아프리카에까지 다양한 명칭을 가진 민간차원의 상조금융이 널리 퍼져 있다. 미국사회에 다양한 소수민족들이 자리 잡으면서 이런 방식 역시 자연스럽게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제도권 금융의 높은 문턱과 과다한 은행 수수료가 이런 현상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 같은 미국사회 트렌드는 계가 지닌 대안금융으로서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줄 뿐 아니라 구성원들 사이의 공동체적 가치를 유지하고 복원하는 데도 계가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살짝 갖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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