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환>
당시의 연방공무원은 국가반역, 뇌물수수, 기타 중범죄를 범하지 않고 품행이 방정 (in good behavior)한 한 파면할 수 없도록 되어있었다. 과반수의석을 차지하고 있었던 공화당 주도의 하원은 Chase 대법관을 탄핵하여 역시 공화당이 다수당인 상원의 재판으로 넘겼다.
그런데 그 재판의 결과는 놀랍고도 미국적인 것이었다. 애국자 Hamilton 을 살인한 혐의를 받고 있던 임기 말의 Burr 부통령은 1805년 1월의 상원의Chase 대법관 탄핵재판을 아주 공평하게 사회했다고 한다. 자기의 적 (제퍼슨)의 적 (Chase)은 나의 친구이다 라는 생각이 발동했을 런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여하튼 공화당 주도하의 상원은 Chase대법관이 탄핵될만한 범죄를 하지도 않았고 그의 행실이 바르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 하였던 것이다.
이 상원의 초당적인 판결에는 두 가지의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이 Chase 대법관이 유죄판결을 받게 되기를 원하고 있던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첫째로는 상원은 대통령의 영향권밖에 있는 독립기관임을 대통령에게 분명히 밝혀 주었고 더 중요하게는 대통령이 별 알맹이가 없는 사유로 대법관 (다른 말로 표현 하자면 정적을)쫓아낼 수 없다는 강경한 교훈을 내린 것이다.
이 탄핵재판 이후로 대통령이 정적제거를 위해 탄핵재판을 쓰는 일이 없어졌는데 이는 추후 미국의 양당정치 와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위해서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미국은 건국초기에 애국적인 대정치가들의 활약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행이도 국가의 먼 장래를 내다보는 훌륭한 대법원장들이 있었다. 미국의 Founding Fathers 들이 나라를 세우고 헌법을 작성해 놓은 후에는 그 헌법이 실제 국가통치상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해석하고 신생국가 질서를 세워나가는 데에는 여섯 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되었던 대법원의 공로 또한 어느 누구에게도 못지않았다.
이 초기 대법원장들 중에 34년이나 자리를 지키면서 큰 업적을 남긴 John Marshall 대법원장이 있다. 그는 버지니아 출신으로서Jefferson 대통령의 사촌이었는데 두 사촌들이 촌스러운 옷을 입고 다녔던 점이 공통일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은 다 두뇌가 명석하였고 자기주장들이 엄청나게 강했던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그런 두 사람들이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다.
제퍼슨 대통령 재임 중 내내 Marshall 대법원장은 대통령을 애먹이고 견제하여 왔었는데 아마 이런 불화관계 또한 미국식 대통령제도의 첫발걸음 교정과 미국적 민주주의의 굳건한 토대를 쌓아 올려가기 위해서 주어진 미국의 “숙명적 축복”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미국에는 최근의 한국처럼 헌법재판소가 따로 있지 않았는데 헌법에는 국가 기관 중 어느 기관이 “어떤 법률이 헌법에 위배되는 것인지를 판단‘할 것인지에 대한 명문상의 규정이 지금까지도 없다.
1789년에 초대 대법원이 구성되면서부터 아마 대법관들은 ‘위헌판결권’이 대법원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왔을 것으로 사료되기는 하지만 특별히 이 문제를 들고 나온 대법원장도 없었으며 그런 권한의 규명을 필요로 하는 사건도 없었던 듯하다. 어쩌면 Marshall 대법원장은 이런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듯도 하다. 드디어 오래 내리고 있던 낚시에 대어가 걸려들었다.
미국 건국이후 통산 12년간 집권을 하여오던 Federalist 당은 1800년의 대통령선거 패배로 정권을 잃게 되자 존 애담스 대통령 퇴임 전에 가능한 한 최다의 Federalist 당 계통 사람들을 연방공무원으로 임명해 놓기로 하였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일어나는 당파를 위한 정치행동이었다.
이때 시작된 이 나쁜 전통은 그 후에도 대통령이 갈릴 적마다 계속 되었고 제7대 앤드류 잭슨 대통령 때에는 아주 터놓고 Spoils System (엽관제도) 라는 명칭까지 붙여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다가 근대에 들어와서야 직업공무원제도가 확립되었다.
임기가 끝나가는 Federalist 당 주도하의 국회는 ‘Judiciary Act of 1801’ 을 입법하여 연방 판사수를 늘리고 Adams 대통령은 연방판사, 고급 세무공무원, 세관관리, 우편국장 등에 Federalist당 계통사람들을 자신의 퇴임 전에 임명하기 위해서 정신이 없었다.
임기가 끝나는 1801년 3월3일 밤 열두 시까지 임명장에 서명을 하고 봉인하였다는데 이것을 ‘Midnight Appointments’라고 불렀으며 이때 임명된 판사들을 ‘Midnight Judges’ 라고 비꼬아서 불렀다고 한다. 3월 4일에 대통령에 취임한 제퍼슨은 이와 같은 인사난맥을 보고 임명장이 본인에게 전달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임명장이 취소되었음을 즉시 통보하였다.
거의 모든 관련자들이 임명취소 통보를 정치적 운명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였으나 말단직인 Justice of Peace에 임명되었었던 William Marbury 라는 사람은 Jefferson 대통령의 임명취소가 위법이라고 소송을 제기하였다. (Marbury vs. Madison: 연방정부를 소송할 때에는 국무장관을 피고로 하는데 당시의 국무장관이 James Madison 이었음) 고소원이나 불감청이던 사건이 Marshall대법원장 손으로 들어온 것이다.
Marshall 대법원장은 1803년 2월에 자신이 작성한 판결문에서 “대통령은 Marbury 의 임명을 취소할 권한이 없다. 그러나 원고주장의 모법이 되는 Judiciay Act of 1789 의 일부분이 헌법에 위배됨으로 그 부분은 무효이며 따라서 Marbury 의 소송은 법적인 근거가 없다” 라고 판결하였다.
원고 피고가 동시에 다 패소했다는 애매모호한 판결인데 정말 중요했던 것은 이판결문에서 Marshall 대법원장은 “헌법에는 법률의 위헌여부결정에 대한 명문상 규정이 없으나 그런 권한은 당연히 대법원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는 의견을 씀으로써 소위 ‘Judicial Review’(대법원의 법률위헌심사권) 이라는 새로운 헌법해석을 내놓은 것이다. 헌법상의 맹점을 바로 잡아놓은 일이었던 까닭에 대법원이 자취해버린 이 권한은 지금까지 큰 도전 없이 전통적으로 존중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 판결을 중요한 역사적인 대법원 판례중의 하나라고 본다. 헌법개정으로 처리되었어야 했을 문제를 대법원이 대법원 판례로서 해결한 좋은 예이다. 대법원은 이 판례를 대법원의 권위앙양과 연방정부 권한 확대에 이용해왔다.
제퍼슨 대통령의 애물단지 Burr 부통령은 어찌되었는지 궁금하시리라고 생각된다. 그는 Hamilton 을 결투살해한 후 Chase 대법관의 상원탄핵재판을 공평하게 끝내고 뉴욕주와 뉴저지주의 체포영장을 피해서 서부 쪽으로 행방을 감춘다.
이때의 행적에 대해서 1. 뉴올리언스를 점령하여 새 나라를 만들고자 하였다. 2 미시시피 강 서부를 미국의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다. 3. 멕시코 북부를 멕시코로부터 탈취하여 새 나라를 만들고자 하였다. 등의 얘기들이 분분하지만 어떤 것이 사실인지 분명히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루이지애나 주지사는 Burr가 어떤 성격의 국가반역죄를 범하고 있다고 고발하였다.
제퍼슨 대통령은 Burr 를 국가반역죄로 기소되도록 하였다. 1807년 8월에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에서 Marshall 대법원장이 이 사건을 재판하였다. 그는 배심원들 에게 주는 재판 설명에서 ‘국가반역죄’로 처형하자면 피고인이 1. 전쟁에 공개적으로 참전했어야 하며, 2. 그런 사실을 최소한 두 명이 증언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런 설명은 국가반역죄 처벌의 기준을 상당히 높인 것으로써 연방검찰이 입증을 하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Burr는 이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뉴욕시로 돌아와 변호사로서 여생을 잘 보냈다.
이 대법원판례는 그 후 미국 역사상 국가반역죄를 적용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어서 집권자가 야당인사나 자기의 정적을 국가반역죄로 처벌하려는 것이 어렵도록 만들었다. 이 대법원판례가 국가건설초기에 없었었더라면 미국의 양당정치나 민주주의의 성장은 크게 지장을 받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