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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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29) 제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3)

2014-10-1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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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미 여러 번 제퍼슨 대통령이 위대한 업적을 남긴 분이었다고 얘기했는데 그런 주장의 증거로써 아래에 그 구체적인 사례들을 보면서 설명하여 보고자 한다.

제퍼슨은 국제정세의 극적인 변화로 찾아온 미국의 위기를 그때마다 탁월한 국제정치인답게 전쟁을 피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결단을 내려 미국의 기회가 되게 만들었으며 국내정치에 대해서도 대정치인다운 판단으로 정치를 하여 여러 가지의 좋은 정치적 선례들을 시작하여 놓았다.

“삼권분립제도”하의 미국 법원은 처음에는 국회가 입법해놓은 법률을 행정부가 공평하게 집행하고 있는가를 재판만 하는 정도이면 될 것으로 생각 하였던 듯하다. 국회가 입법해놓은 법률이 헌법에 위배되는지의 여부는 누가 판단하여야 하는 것은 헌법에 애당초 규정되어있지도 않았다.


제퍼슨 대통령의 임기 중에 제퍼슨의 사촌이었던 대법원장 존 AKTIF 인도하의 대법원은 미국 정치상 아주 중요한 몇 가지의 대법원판례들을 내놓아 헌법에는 명문상 규정이 다소 모호했던 삼권분립의 기틀을 잡아 놓았다. 이 대법원 판례들에 대해서도 곧 설명하고자 한다.

아프리카 북단에 Barbary States라 불렸던 모로코, 알제리, 튜니지아, 트리폴리 등의 아랍사람들이 통치하던 모슬렘 국가들이 있었는데 최근에 소말리아가 해적질을 했던 것처럼 이들 나라들도 16세기부터 19세기 까지 해적들을 지중해와 때로는 대서양에까지 보내서 유럽과 미국의 선박들을 노략질하거나 나포하여 거액의 인질 값을 받아내곤 하였다.

모든 나라들이 전쟁을 하는 것보다는 돈이 덜 든다는 생각으로 ‘해적세금’을 내어오고 있어서 이 해적질들은 계속되고 있었다. 미국도 1790년부터 1800년도까지 10년 동안에만 2백만 달러에 해당되는 해적세금을 내고 있었는데 미국은 매년 무역량이 늘어나고 있었다.

제퍼슨 대통령은 이 해적들의 망동을 중단시켜야 한다고 결심하였다. 수입관세를 2.5%를 올려서 “지중해기금” 까지 마련해 가면서 1804년에 미국 해군 군함 들을 보내어 트리폴리로 부터 해적질을 안 하겠다는 조약을 첫 번 임기 말인 1805년 1월에 받아내었다.

이 조약이 체결된 후 미국선박들에 대한 해적질은 다소 감소하였으나 해적질은 그 후에도 꾸준히 계속되어 미국은 제임스 메디슨 대통령 때인 1815년에 본격 적인 해군함대를 다시 출동시켜야 했으며 이 해적질들은 1830년 불란서가 알제리아를 식민지로 정복해버린 후에야 근절되었다고 한다.

Tripoli 조약으로 해적의 침해가 다소 줄어들자 New England 지역의 무역업자들과 대구 등 각종의 해산물들을 수출하던 수산업계가 대환영을 하였으며 이 조약체결의 부산물로 제퍼슨은 Federalist 당의 지지기반이던 New England 지역에서도 지지기반을 다소 획득하게 되었다.

제퍼슨 대통령은 국제정세의 변화로 자신이 주장해오던 대통령 통치 원칙 중 두 가지를 취임 후 지킬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과거의 주장에 자승자박되지 않고 미국의 원대한 장래를 내다보는 현명하고 정치인다운 결단을 내린다.

첫째의 원칙은 헌법의 협의해석자답게 연방국회와 대통령은 헌법에 명문으로 허용된 임무만 수행해야 된다는 것이었는데 어떤 당면한 문제의 처리가 헌법에서 국회와 대통령에게 허용한 것인지를 자신의 결단으로 광의적으로 판단하여야만 하게 되었었고 둘째로는 재정지출을 최소화하겠다고 한 대통령이었지만 그때까지의 어느 미국대통령 보다 큰 재정지출을 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사정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은 미시시피 강 동쪽의 농토에서 산출되는 농산물들의 8분지 3을 미시시피 강으로 내려 보내 그 강의 하단에 있는 New Orleans 항을 통과하여 멕시코만을 거쳐 대서양으로 나가서 유럽에 수출하였다. 미시시피 강은 미국의 동맥과 같은 역할을 하였고 그 강의 하단에 있는 New Orleans 항은 파이프의 밸브처럼 동맥을 차단할 수도 있는 자물쇠나 마찬가지 이었다.

18세기 초부터 미시시피 강 주변 땅들과 New Orleans지역을 전쟁 끝에 불란서로부터 양도받아 스페인이 점유하여 왔는데 미국은 스페인을 잘 조종 하여 큰 위협을 받지 않고 그것들을 이용해 왔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불란서를 통치하게 되면서 군사적인 위협 끝에 불란서가 스페인으로부터 이 지역 전부를 비밀리에 도로 양도받았는데 미국은 이것을 모르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Louis 14세의 이름을 따서 Louisiana라고 이름 지어진 이 지역과 카리브 해에 있던 식민지들을 합하여 New French Empire를 북미주에 세울 꿈을 꾸면서 1802년에는 대규모의 병력을 Louisiana 에 보낼 계획을 하고 있었다.

이 Louisiana Territory 는 북쪽이나 서쪽의 경계조차 분명하지 않았으나 나중에 미국의 신생 13개주로 분할될 만큼 큰 땅덩어리 이었다. 미국과 불란서와의 관계는 이때쯤 이미 나빠져 있었는데 나폴레옹 통치하의 불란서는 미국의 농산물 수출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은 불란서의 위협 속에 눈치를 보며 수출을 하거나 아니면 불란서가 요구하는 대로 통행료를 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제퍼슨 대통령이 현명하게 해결해야 할 국제적 위기가 발생한 것이다.

고심하던 끝에 제퍼슨 대통령은 미국이 New Orleans 항 주변의 땅을 불란서로 부터 사들어야만 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분은 비밀리에 국회로부터 New Orleans 항 주변의 땅을 2백만 달러에 사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고 흥정만 된다면 천만 달러까지는 지불해도 된다는 허락도 받아 두었다.

당시 주불 미국공사 Robert Livingston 이외에 제퍼슨 대통령은 같은 버지니아 주 출신인 제임스 몬로를 특사로 보내어 Livingston 공사와 함께 나폴레옹 을 찾아가게 한다. 조심스럽게 나폴레온에게 New Orleans항을 미국에게 팔 것을 교섭해 보았다. 나폴레옹 의 대답은 한마디로 ”No”이었다. 하늘이 노랗게 보이는 이 두 특사들에게 나폴레옹은 New Orleans를 팔 생각이 없고 rent할 생각도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잠시 후 나폴레옹 은 “미국이 그렇게 원하면 New Orleans를 포함해서 Louisiana 전부를 사면 어떻겠느냐?” 라고 제안하였다.

아무리 고소원이나 불감청이라지만 이런 청천벽력 같은 횡재가 있을 수 있는가!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 라고 말한 후 공사관에 돌아온 두 특사들은 깊은 고민에 쌓이게 되었다. 나폴레옹 은 어려운 결단을 빠르게 내리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마음을 쉽게 번복을 잘하는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만일 미국 특사들이 나폴레옹 에게 “말씀은 감사하오나 본국의 대통령과 국회의 허가를 받은 후 답을 드리겠사오니 몇 달만 시간을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했더라면 그 다음날 나폴레옹 은 사람을 보내어 “땅 파는 얘기는 없던 것으로 하자” 라고 해버릴 가능성이 큰일이었다.

두특사는 미국의 장래를 위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장래도 같은 도마 위에 올려놓기로 결심하였다. 나폴레옹 을 찾아가서 “천오백만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라고 운을 띄웠더니 그는 “그리하자” 라고 쉽게 받아들였다. 나폴레옹 이 미국의 제안을 흥정도 하지 않고 받아 드린 데에는 미국이 미처 몰랐던 비밀이 또 하나 있었다.

불란서는 카리브 해에 있는 Haiti 에 흑인노예 60만 명, 불란서인 10만 명을 두어서 아주 수지맞는 농업식민지로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불란서혁명 중에 혁명의회는 Haiti 의 노예제도를 폐지하였는데 흑인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켜 불란서인들을 죽이고 흑인천지를 만들었다. 노예출신인 흑인장군 Toussaint Louverture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반란을 진압하도록 하였는데 반란을 진압한 그는 변심하여 흑인국가를 세웠다.

이때 집권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1801년에 노예제도를 복원시키면서 자기 매제 Charles Leclerc 장군을 새 토벌사령관으로 임명하고 2만5천명의 병력을 주었으나 Louverture 를 유인하여 체포한 것 이외에는 토벌도 성공하지 못한 채로 1802년에 황열병으로 죽고 군수물자만 반란군에게 다 뺏겼다.

1803년 1월에 임명된 새 토벌군 사령관은 3만5천 명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나폴레옹 에게 얘기하였는데 영국과의 전쟁으로 국력을 탕진하고 있던 불란서는 그런 병력을 동원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나폴레옹 은 Haiti도 탈환하지 못하는 국력으로서는 북미 Louisiana를 바탕으로 New French Empire를 세워보려던 꿈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임을 깨닫고 미국에 Louisiana를 팔아버리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미국은 불란서와 토벌군에게 물건을 수출하였으며 1804년에 Haiti가 유일한 흑인노예혁명으로 최초로 남미에서 독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독립을 오랫동안 인정하지 않았었다. 미국은 이때의 은혜를 Haiti에게 두고두고 갚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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