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 아침의 시

2014-10-02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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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는 일평생의 중반쯤 도달하면 최고의 맹수가 된다
눈감고도 쏜살같이 먹이를 낚아챈다
그런 때가 오면 독수리는
평생 종횡무진 누비던 하늘에서 스스로 떨어져
외진 벼랑이나 깊은 동굴로 사라진다
거기서 제 부리로 자신을 쪼아댄다
무시무시하게 자라버린 암갈색 날개 깃털을 뽑고
뭉툭하게 두꺼워진 발톱을 하나씩하나씩 모조리 뽑아낸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며칠 동안 피를 흘린다
숙달된 비행을 포기한 채 피투성이 몸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린다

이제는 무대에 오르지 않는
아니
캐스팅도 안 되고 오디션 보기도 어중간한 중년여자 연극배우가
술자리에서 내게 들려준 얘기다
너무 취해서 헛소리를 했거나 내가 잘못 옮겼을 수도 있겠지만
아직도 확인해보지 않았다
그냥 믿고 싶어서
경사가 급한 어두운 골목길 끝에 있는 그녀의 방까지
나는 바짝 마른 독수리 등에 업혀갔다

- 김이듬 (1969- ) ‘독수리 시간’ 전문



술에 취한 중년의 여배우와 시인이 마주 앉아 독수리를 이야기한다. 중년이 되면 가장 무서운 천적이 되는 독수리처럼 이들의 삶, 혹은 예술도 위험스런 정점에 이른 것일까. 그리하여 자신만의 깊은 동굴로 돌아가 무시무시하게 자라버린 기교의 발톱을 뽑으려는 것인가. 한 발 더 나아가면 파멸을 불러오고 말 Tipping Point. 스스로의 능수능란한 깃털과 발톱을 뽑아낸 자, 빼어난 맹수요, 진정한 고수로 다시 태어나리라.

- 임혜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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