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 아침의 시

2014-09-25 (목) 12:00:00
크게 작게
어릴 적에는 호주머니가 지갑이었지
구슬이나 딱지 그리고 때 묻은 손이 드나들 적마다
함께 따라 들어온 먼지 한 움큼이 들어있었지
쏘다니고 싶은 곳 많아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휘파람 불며 집 밖을 자주 떠돌아다녔지

나이 들어서 생긴 가죽 지갑 속에는
사진과 명함, 주민증과 카드들이 한 가득 들어있었지
갈 곳 많아도 지갑 없이는 함부로 집 밖에 나설 수 없었지
한 생을 끌고 다니는 지갑
두툼해질수록 내 영혼 여위어갔지

- 이재무 (1958- ) ‘지갑에 대하여’ 전문



어린 시절 우리의 주머니 속에는 별 특별한 것이 없었다. 기껏해야 구슬이나 딱지가 들어있었을까. 하지만 우리는 즐거웠다. 꾀죄죄한 먼지만 풀풀 날리는 주머니로도 마냥 행복하던 시절은 가고 무거워진 지갑에 끌려 우리는 어디를 헤매고 있는 것일까. 살아오면서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지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다. 우린 너무 멀리 온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생의 무게에 눌려 여위어가는 영혼을 살피기 시작할 때가 아닌가.

- 임혜신<시인>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