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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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24) 워싱턴 대통령 중임 4년간의 외교적 업적

2014-09-1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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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환>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을 한 번 더 하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는 측근들의 강력한 중임권고도 있었지만 더 중요하게는 국제정세가 미국의 안보에 위험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대통령직을 떠날 수가 없다고 판단한 탓이었다.

이와 같은 결단이 워싱턴의 독재자적 자질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두 번째 대통령 임기 중에 외교적으로 워싱턴이 이루어 놓은 것들을 보면 그는 미국이 필요로 했던 적시적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미국은 영국, 스페인, 프랑스 등 유럽의 최강 국가들과 통상, 해운, 영토 등의 문제로 적대관계에 있었다.


다행히 영국과 스페인은 계속 전쟁 중에 있었고 불란서는 1789년에 국민혁명이 성공된 후 Louis 16세와 Marie Antoinette 왕후를 단두대에서 참수한 후 ‘왕조 타도 혁명’을 유럽의 모든 왕국들에게 수출하려고 하면서 모든 왕조에게 선전포고를 해놓은 상태이었다. 까닭에 이들 삼개 국들이 미국과 전쟁을 원하지도 않았으나 미국도 전쟁을 할 수 있는 국력이 없었다.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인정한 1783년도의 미국과의 강화조약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미국 내에 있는 영국 모피수집상기지들을 완전히 철수하지도 않았고 미국과 전쟁 중인 미국원주민들에게 무기를 공급하고 있었다. 영국은 그전처럼 미국 배들의 해운을 방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 해군군함을 무단 정지시키고 승선하여 미국국적을 획득한 해군장병들을 체포하여 영국의 군함에서 강제로 복무하도록 하였다. 미국 국민의 반영감정이 극히 악화되어서 일부 국민들은 영국과의 전쟁을 원하기까지 하였다.

워싱턴 은 John Jay 대법원장을 영국에 특사로 보내어 일 년여 만에 영국이 모피상기지를 철수하겠다는 것과 미국에 대한 통상제한을 완화하겠다는 것 등을 약속한 조약을 영국으로 부터 받아 왔는데 많은 의원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대통령의 영향력을 총동원하여서 상원의 비준을 겨우 받아냈다. 워싱턴은 재임 중에 서북부 쪽의 여러 미국원주민종족들과 계속 전쟁을 하면서 미국이 몇 번을 크게 패전까지 하였었으나 종래에는 우세를 만회하여 그 종족들과도 평화조약을 맺었다.

미국의 농산물들을 유럽에 수출하고 유럽에서 필요한 물자들을 수입하기 위하여 미국은 미시시피 강의 자유스러운 운항과 그 강의 입구격인 New Orleans 항을 제약 없는 통행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미시시피 강변 여러 곳과 New Orleans 항을 소유하고 있던 스페인은 항상 미국의 운항에 제약을 주고 비싼 통과료를 부과 하여왔었다. 스페인은 미국 내의 영토 확장도 꿈꾸고 있었고 현재의 켄터키 주와 테네시 주가 있는 땅들을 욕심내기도 하였다.

스페인과의 일전이 불가피하다고 미국사람들이 분개하고 있는 가운데 워싱턴은 스페인으로 특사를 보냈다. 미국의 특사가 스페인에 가기 얼마 전에 미국이 영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보고 스페인은 미국이 영국과 연합하여 스페인과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까닭에 스페인은 미국이 요구하는 대로 미시시피 강과 New Orleans 항을 거의 자유스럽게 사용하도록 하는 조약을 미국과 체결하였다.

미국의 독립전쟁초기부터 불란서의 Louis 16세 왕은 탄약, 자금, 육해군 등을 미국에 보내서 미국독립의 은인적 역할을 했었다. 그러나 불란서 국민들은 미국이 영국에 항전하여 독립 쟁취를 한 것에 감명을 받아 불란서 왕정을 멸망시키고 국민혁명에 성공하였다. 혁명성공후 몇 년 안에 과격파인 Jacobin당이 집권을 한 후 전 유럽에 왕정타도와 국민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며 왕족, 귀족, 고위성직자 등등 2만여 명을 단두대에서 참형하였다. 유럽의 거의 모든 왕조들이 불란서와의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불란서의 외교정책이 해마다, 때로는 달마다 변경이 되어 미국을 혼돈스럽게 하였다. 워싱턴 은 이때 미국의 중립선언을 하여 미국이 유럽의 분쟁에 뛰어들 의도가 없음을 공표하였다. 이 정책에 찬동하지 않은 Jefferson 국무장관직을 사임한다.

불란서혁명의 과격적인 잔인성에 경악한 Hamilton 을 비롯한 ‘친영파’ Federalist 들은 불란서와의 친교에 제동을 걸었는데 주불공사를 지낸 적이 있는 ‘친불파’ Jefferson 과 그가 이끌던 공화당은 불란서와 친교를 강화할 것을 주장했다. 그 결과 미국역사상 최초로 정당 간에 극단적인 용어들을 쓴 충돌이 있었다.
미국 농민들은 농산물의 원거리 운반이 극히 어려웠던 탓에 생산되는 곡물 중 상당한 량을 위스키로 만들었다. 위스키는 원거리 운반에 편리 했을 뿐만 아니라 일부지역에서는 화폐로서 사용되기도 하였었다.


연방정부는 이 위스키에 위스키 택스를 부과해왔다. “부당한 영국의 과세에 저항하여 우리가 독립을 쟁취했는데 이제 우리의 정부가 또 부당한 세금을 부과한단 말이냐” 라고 불평하면서 서부 펜실베니아주 농민들이 납세를 거부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당시의 펜실베니아 주지사는 이 폭동을 재판으로 처리하고자 하였었지만 워싱턴 대통령은 연방민병대 만 오천 명을 동원하여 이 폭동을 진압하고 주동자 두 명을 국가반역죄로 체포하여 재판에 붙였다.

그 후 워싱턴 대통령은 유죄판결을 받은 이 주동자 두 명을 사면해 주었다. 워싱턴 대통령은 이 폭동을 무력으로 진압함으로써 연방법위반자는 반드시 처벌될 것임을 보여 주었으며 동시에 주동자들을 사면해줌으로써 대통령의 포용성도 국민에게 보여 주었다.

워싱턴 대통령은 국민들의 일시적인 여론에 휩쓸리지 않고 후기 재임4년 동안 미국이 감당할 수 없는 전쟁을 피해 평화 속에서 성장하도록 인도하였다.
워싱턴 대통령은 퇴임에 앞서서 ‘Farewell Address’라고 불리는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실은 이 담화문은 Hamilton 이 작성한 것으로서 워싱턴 대통령이 직접 연설을 한 적이 없는 것이었지만 신문에 발표가 되어버려서 George 워싱턴 대통령의 Farewell Address 라고 미국역사에 기록되었다.

1794년 9월에 발표된 이 Farewell Address 에서 워싱턴 대통령은 자신이 삼선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미국은 아직도 정치시험관속에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미국 국민들에게 미합중국에 충성할 것과 미국식 대의 정치제도를 계속 지지해 줄 것을 호소했다. 또 그는 국민들에게 지역적 산업, 문화, 전통 등의 차이로 인한 지방색을 내는 분열을 하지 않을 것과 마치 그 후 70여년 후에 노예제도 때문에 일어난 남북전쟁을 예견이라도 했던 것처럼 각주의 연방탈퇴로 까지 이르는 분쟁이 없도록 할 것을 당부하였고 정당정치의 폐해가 생기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호소하였다. 마지막으로 워싱턴 대통령은 혼잡한 국제사회에서 서툴게 어떤 특정 국가들과 연맹을 맺음으로서 미국이 위험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경고하였다.

이때가 조선에서는 정조의 재위말과 순조재위초기에 해당된다. 영조가 망국적인 사색당파를 없애기 위해 시작한 탕평정책을 정조가 계승하고 규장각을 신설하여 학문을 숭상하고 문화와 문예가 진흥되는 듯싶었었다. 그러나 정조가 사망하고 그의 손자 순조가 열한 살에 등극하고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부터 그분의 친정인 안동 김 씨들의 60년간의 세도정치가 시작되고 조선은 쇄국적인 쇄국의 길로 들어섰다.

만일 그때부터 시작된 천주교인 학살과 종교탄압이 없었더라면, 북학과 실학자들을 탄압하지 않고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 때부터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던 서양문물, 철학, 과학, 사상들에 문호를 개방했었다면 그 후의 조선의 국운은 쇄국일변도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결과를 보고 거꾸로 역사를 써 올려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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