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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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본 미국역사(23) 삼권분립식 정치의 실험

2014-09-0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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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환>

왕의 전제주의적 통치에만 익숙해왔던 세상에 정부를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등 세 개의 권한으로 구분해놓고 이 세 권력들이 거의 대등한 권한으로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잡아나가게 만든 새나라 미국의 통치방법은 온 세상이 숨을 죽이고 쳐다보고 있는 시험관속에서 인공수정 되고 성장하였다. 이미 이때쯤에는 상당한 권한을 가진 의회들이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정치하고 있었지만 국민의 선거로 ‘왕’에 버금가는 권한을 가질 대통령을 국민들이 직접 선거하여 뽑고 국회와 대통령의 합의로 영존직인 독립적 판사들을 임명하거나 선출한다는 일은 세상 어디에도 그때까지 있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전 세계에서 그때까지 한 번도 시험되어보지 않은 ‘대통령제도’ 라는 통치제도의 승패는 미국 초대 대통령과 미국 국회에 달려 있다는 역사의식이 조지 워싱턴 대통령에게 있었다. 그는 대통령에게 강력한 지도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초대 대통령의 언행과 통치방법들이 장래 미국 대통령들에게 ‘선례와 전통’이 될 것이 라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삼권 분립식 정부형태의 모범이라고 생각하는 미국의 헌법에는 ‘삼권분립’이라는 것이 어떻게 집행되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워싱턴 대통령의 재임기간 동안에 삼권분립 정치의 시행착오가 반복되면서 차츰 틀이 잡혀나가기 시작하였다. 워싱턴 대통령은 집권초기에 ‘대통령’ 이라는 직책이 영국의 ‘왕 보다는 ‘총리‘에 더 가까운 성격이라고 생각하였던 듯하다.

워싱턴은 전쟁성장관을 대동하고 상원에 가서 미국 원주민들과의 전쟁에 관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토의하고 조언을 받겠다고 하면서 상원을 사회하게 되어있는 부통령의 자리에 앉았으나 상원의원들은 대통령 참석 하에 토론하기를 거부하였다. 대통령이 국회의 정책심의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없다는 선례가 생긴 것이다.

6피트 2인치가 되는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을 가진 워싱턴의 풍채와 거동에서 풍기는 위엄이 대통령의 권위를 수립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는 또 당시의 수도이었던 뉴욕시의 가장 좋은 저택들 중의 하나를 대통령관저로 임대하고 제복을 입은 직원들이 일하도록 하였으며 여섯 필의 말이 끄는 canary색 (진한 노란 색)의 대통령전용 큰 마차에는 워싱턴가의 문양(coat of arms)을 그려놓았다고 한다. 그는 공식 파티를 열적마다 영국의 귀족들처럼 검은 벨벳 옷을 입고 비단 스타킹을 신고 나오는 등 미국 대통령의 위엄을 인위적으로도 크게 보이도록 노력하였던 듯하다.

국회는 새 정부의 부서로써 국무성, 재무성, 전쟁성, 우편성, 검찰총장 등을 설립하였고 사법기관으로 대법원, 세 개의 고등법원, 열세개의 지방법원등을 설립하고 소송절차 규정도 작성하였다. 각 지방법원에서 일하게 될 연방검사들과 연방경찰 (U.S. Marshal)등도 임명하였다. 대법원은 국제조약과 연방법을 해석하는 권한을 가졌고 연방법과 주법간의 충돌이 있을 경우 대법원이 그 차이점을 처리할 권한을 대법원에게 주었다. 각 주들은 연방헌법초안을 심의하고 통과시키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의 반대조건이나 수정요구 등을 제시하면서 헌법초안에 찬동하였다.

헌법초안 작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던 버지니아 주의 James Madison은 각주들의 제안을 종합하여 소위 Bill of Rights 라고도 불리는 열개의 개정조항 (10 Amendments) 들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이 개정조항들은 주로 국민의 인권보장에 관한 조항들이었다.

삼권분립이라는 헌법상의 대원칙은 규정되어 있었으나 대통령과 각성의 장관들과의 관계나 장관들과 국회와의 관계 등은 구체적인 규정이 없어서 처음에는 심각한 혼선이 있었다. 대통령제도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초대 재무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해밀턴은 영국의 장관들처럼 미국의 장관들도 입법과정에 참여해아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일부에서는 각성의 장관은 최고위 직업공무원으로써 대통령의 퇴임 후에도 계속 근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장관은 소관사무에 대한 정책수립에 넓은 재량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국내정치적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입법과정에서 대통령이 직접 참견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이 세워졌다. 워싱턴 대통령은 해밀턴 재무장관에게 재정정책을 거의 독자적으로 수립하는 것을 허용하였으나 외교문제에 대해서는 국무, 재무, 전쟁성 장관들과 검찰총장을 소집하여 의논하고 결정하였다. 대통령제도하의 국무회의가 이와 같이 시작된 것이다.

삼권분립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국회의 지도자 제임스 매디슨은 해밀턴 장관에게 재정수입정책과 국가재정 신용증진정책을 수립하여 국회에 제출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처럼 입법부가 행정부장관에게 직접 지시하는 일은 대통령제도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약삭빠른 해밀턴은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미국의 재정정책, 금융정책, 산업정책에 대한 엄청난 입법안을 국회에 직접 제출하였다. 해밀턴은 미국의 재정, 금융, 산업에 관한 세 가지 입법제안을 하였는데 그 입법제안들은 이후 미국의 장래를 아주 심각하게 변형시킬 수 있는 중대한 법안들이었다. 첫째는 ‘국가재정신용’(public credit, 1790년 1월), 둘째로 ‘국립은행’ (nationalbank, ‘중앙은행’, 1790년 12월), 셋째로 ‘산업진흥’(manufactures, 1791년 12월) 이란 제목의 정책 개정안들이었다.


해밀턴은 연방정부의 독립전쟁부채가 5천4백만 달러(미국 일반인들의 월급이 5-7불 정도일 때)이나 되고 각주의 부채도 2천만 달러이나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국고는 텅 비어 있었다. 연방정부 부채 중 불란서정부와 화란은행들에서 빌려온 액수가 천만 달러이었으며 나머지는 미국국민들에게 진 빚이었다. 독립 전쟁 중에 연방정부는 군인들의 월급과 기타 공무지출비용을 현금대신에 국채로 지불하였으며 국채를 받은 사람들은 미국일반국민들에게 국채를 대폭 할인하여 넘겨주고 현금을 받아썼다.

연방정부 재정신용이 아주 나빴을 적에는 국채액면가의 15%내지 20%만 현금으로 받을 수 있었다. 이 국채를 사들인 사람들은 대부분 돈이 많은 투기꾼들이었다. 불란서정부와 화란은행들에서 빌린 부채를 전액 다 갚는 데에는 의견의 일치가 있었다. 그러나 해밀턴은 일부 연방하원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국가신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채를 밀린 이자와 함께 전액 액면대로 모든 채권자들에게 상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해밀턴의 제안이 하원을 통과할 조짐을 보이자 다수의 하원의원들도 국채를 마구 사들이기 시작하였다. 결국 해밀턴의 원안이 관철되었다.

해밀턴은 각 주가 진 2천만 달러의 전쟁부채도 연방정부가 갚아 주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자기주의 부채를 이미 완전히 상환해버린 버지니아 주, 메릴랜드 주 등은 이 제안에 완강히 반대하면서 왜 자기 주들이 메사추세츠 주와 남 캐롤라이나 주의 빚을 갚아주어야 하느냐고 말하였다.

해밀턴은 버지니아 출신들인 국무장관 토마스 제퍼슨과 제임스 매디슨에게 만일 그들이 각주의 독립전쟁부채를 연방정부가 갚는 법안을 통과시켜주면 1790-1800년 동안만 연방수도를 필라델피아에 두고 그 후에는 버지니아 주가 원하는 대로 연방수도를 현재의 워싱턴 D.C.로 옮기는 안이 통과되도록 협조하겠다고 타협을 해서 해밀턴 원안이 하원을 통과되도록 하였다. 이 입법은 그 후 미국의 부자들이 안심하고 정부사업에 투자하도록 만들었으며 연방정부가 주정부보다 상위에 있음을 정치적으로 확인 되도록 만드는 효과도 있었다. 국가재정신용이 복원됨에 따라 투자가들은 안심하고 국채와 교환하여 새 정부의 국채를 받아드렸던 탓에 현금의 지출 없이 독립전쟁 국채문제를 해결하였다.

해밀턴의 두 번째 입법제안은 국립은행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 국립은행은 자본금의 5분의1인 2백만 달러를 연방정부가 투자하고 5분지1의 은행이사를 임명하도록 하며 나머지는 민간의 투자로 설립하여서 연방정부가 징수한 세금과 기타수입을 관리하고 필요할 때에는 국립은행이 연방정부에게 돈을 빌려주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민간인들은 현금대신에 독립 전쟁 때 받은 국채로 이 국립은행에 투자할 수도 있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민간인 투자자들이 자신도 미처 모르는 사이에 몇 년 후에는 연방정부에서 현금으로 받을 수 있는 채권을 국립은행의 자본금으로 영구 투자한 결과가 되는 것이었다. 물론 이 투자자들은 나중에 국립은행의 주식을 증권시장에서 딴 투자자들에게 팔아서 손해나 이익을 보면서 현금화 할 수도 있지만 국립은행자체의 현금은 지출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미국에 민간은행이 세 개밖에 없어서 일반 국민들의 은행융자가 쉽지 않았는데 국립은행이 민간인들에게도 융자를 해주도록 하였다. 이 국립은행은 그때까지 통용되던 금화, 은화 대신에 지폐를 발행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미국 통화정책에도 관여하여 “중앙은행”적인 역할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 연방헌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데 크게 보아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협의해석(Strict Construction)’은 연방정부의 권한은 헌법에 명문으로 규정된 것들에 한정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비해 ‘광의해석(Broad Construction)’은 헌법에 명문으로 규정된 연방정부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연방정부는 필요한 모든 권한들을 행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역사를 보면 야당은 ‘협의해석’을 주장하였고 여당은 ‘광의해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해밀턴의 입법제안은 ‘광의해석’적인 것이었으며 강력한 중앙정부를 역설한 것이었기 때문에 ‘Federalist’적 주장이었다.

국립은행설립에 반대한 토마스 제퍼슨과 제임스 매디슨 등은 협의해석을 주장하였는데 이들은 미국이 농업을 중시해야 하고 중앙정부는 너무 강대해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와 같은 주장들을 ‘Jeffersonian’적인 것이라고도 부른다. 이 Jeffersonian 통치철학에 기초를 두고 출발한 정당이 미국의 공화당 (Republicans)이다. 해밀턴이 제안한 국립은행법이 국회를 통과하자 원래는 Jeffersonian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버지니아 주 출신인 워싱턴 대통령은 이 법에 서명하였다.

해밀턴이 제안한 세 번째 입법안은 미국국내 산업을 증진하기 위한 법안이었다. 이 법안의 근본적인 규정은 미국산업의 창업과 성장을 돕기 위하여 모든 수입 물자에 보호관세를 부과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호관세가 부과되면 수입되는 모든 농기구들의 값이 올라가게 됨으로 남부 주들의 대농장주들이 반대하였고 많은 생활용품과 가구들을 수입해서 쓰는 북부 주들의 상업인들과 주민들도 반대하여서 결국은 입법화 되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차츰 노골적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한 정당들의 활동을 보고 워싱턴 대통령은 정당을 반대하였고 모든 정치는 애국심으로만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워싱턴은 초대대통령 재임 4년 동안 미국이 전쟁에 휩쓸리지 않도록 인도하였으며 그 후 미국역사의 방향을 대강 잡아놓았다. 그는 퇴임 후 버지니아 농장에 돌아가서 살고자 하였는데 제퍼슨, 매디슨, 해밀턴까지 총동원되어 대통령을 한 번 더 해야 한다는 강력한 권고를 받아들여 제2대 대통령에 다시 취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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