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 아침의 시

2014-08-07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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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가 붓꽃들은 노랑 다홍 빨강 색색의 전기가 들어온다고 좋아하였다
울타리 오이 넝쿨을 5촉짜리 노란 오이꽃이나 많이 피웠으면 좋겠다고 했다
닭장 밑 두꺼비는 찌르르르 푸른 전류가 흐르는 여치나 넙죽 넙죽 받아먹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식구들은 늦은 저녁 날벌레 달려드는 전구 아래 둘러앉아 양푼 가득 삶은 감자라도 배불리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해 여름 드디어 장독대 옆 백일홍에도 전기가 들어왔다
이제 꽃이 바람에 꺾이거나 시들거나 하는 걱정은 덜게 되었다
꽃대궁에 스위치를 달아 백일홍을 껐다 켰다 할 수 있게 되었다

- 송찬호 (1959-) ‘옛적 고향 마을에 전기가 들어올 무렵’


전기가 들어오기 전, 그러니까 불과 몇 십 년 전엔 꽃만이 꽃이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밤낮 없는 불꽃 천지다. 처음엔 꽃들도 반가워 맞이하였을 전구꽃이 세상을 다 망가뜨릴 듯 죽지도 않는 전선의 줄기를 타고 쭈욱 쭈욱 번진다. 에너지 좀 아끼고 지구를 구해야 하는데, 흙과 꽃과 하늘과 짐승과 우리 아이들을 구해야 하는데 방법이 갈수록 없어진다. 장독대 옆의 백일홍, 뜰의 붓꽃과 함께 피고 지며 살았던 그리운 지난 날, 그 순함이 그립기만 하다.

- 임혜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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