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 아침의 시

2014-08-05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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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서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하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 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있는 것이었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 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게 없었다
내 열무밭은 꽃밭이지
만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 문태준 (1970-) ‘극빈’ 전문


과일나무에 꽃이 피고 나면 벌 나비 날아들어 달콤한 열매를 맺게 되지만 열무에 꽃이 피면 쇠어버려 먹을 수가 없다. 열무를 심어놓고 꽃을 보려 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화자는 때 지난 열무밭을 은근히 즐기고 있다. 나비 떼 날아와 선잠처럼 머물다 가는 꽃밭에서 비경제적, 게으름의 화락을 누리는 이. 줄기도 뿌리도 꽃도 다 놓치고 나서 만나는 빈손의 풍요는 쌉싸롬한 열무 향기처럼 영혼의 혀끝에서 오히려 감미롭다.

- 임혜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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