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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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18) 건국을 위한 정치적 투쟁

2014-08-0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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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환>

지난 호까지의 글을 읽어보신 독자들 중에는 미국의 독립이 운수 좋은 군사작전들의 연속적인 성공으로 이루어진 것 같다는 인상을 받으신 분들이 더러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실 미국의 독립은 독립을 위해 직간접으로 전투에 몸을 던진 군인들과 일반 국민들의 희생위에 숙명적으로 그때 등장한 수많은 탁월한 능력의 지도자들의 용감한 정치적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었다. 전투의 승리들은 필요한 조건이기는 했지만 충분한 조건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Founding Fathers의 현명하고 적절한 판단들과 투쟁들이 없었더라면 독립전쟁은 대영제국 역사책의 한 페이지에 ‘진압된 반역사건’으로 한 줄 기록되고 끝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Founding Fathers는 엄밀하게는 George Washington, John Adams, Thomas Jefferson, James Madison, Benjamin Franklin, John Jay, Alexander Hamilton 등 일곱 분을 의미하지만 역사가들 중에는 조금 범위를 넓혀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56명, 초기 헌법인 ‘The Articles of Confederation’이나 미국헌법인 ‘The Co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를 초안하고 제헌의회를 통과하도록 한 분들과 독립전쟁의 지도자 등으로 활동한 분들까지 포함한다고 한다.


인류역사상 최초로 통치 받을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헌법에 따라 통치 받을 사람들의 손에 의해 뽑힌 비교적 짧은 임기의 ‘왕’이 국민대표자들이 만든 법률의 한계 속에서 통치하는 혁명적인 정치실험은 시작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신세계(The New World)’에서의 실험은 그 후 세계 여러 나라의 정치구조를 다 바꾸어 놓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체코의 작곡가로서 미국 흑인 영가들과 미국원주민 노래들을 아주 귀한 미국의 오리지널 토속음악이라고 격찬했다는 드보르작은 잠시 뉴욕의 어느 음악대학장으로 재직했던 1893년에 그의 교향곡 제9번 ‘From the New World’를 미국에 선물했다.

미국의 정치적 투쟁과정을 짧게 요약해 보고자 한다. 반영감정이 점점 무르익어가기 시작한 1760여년 경에는 이미 영국본토 인구 8백만 명의 4분의1에 달하는 2백만 명이 영국 상전에게 고분고분하지 않는 ‘Americans’가 되어가고 있었다. 필자는 지금까지 ‘미국, 국가, 국회, 정부, 미국군, 미군, 국민, 미국인, 각주, 주의회, 중앙정부, 주정부’ 등의 용어를 사용해왔고 아마 독자들께서도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필자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거나 짐작해 가면서 읽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로 보면 그런 용어들은 틀리는 것들이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미국 … 주정부’ 등은 실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때에 따라서 “정부, 국회, 중앙정부, 대륙회의, 대륙의” 등등으로 표현된 것의 실체는 ‘The Continental Congress’이었다. 우리말로 직역하자면 ‘대륙의회’가 되겠지만 ‘대륙’이라는 용어나 ‘의회’라는 용어는 애초부터 맞지 않은 단어들이었다. 영국의 입장에서 보면 불법단체에 불과한 이 단체는 그 모법이 되는 ‘The Articles of Confederation’ 이 1781년이 되기까지 13개주의 동의를 다 얻지 못하였으므로 미국 입장에서 보더라도 실은 ‘비합법적인’ 단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Continental Congress는 13개의 식민 주의회에서 뽑은 “의원”들 56명으로 구성되었다.

The First Continental Congress가 1774년 9월 5일에 필라델피아에서 조지아 주가 빠진 12주의 대표 56명의 참석으로 개최되어 미국의 장래에 관한 분분한 의견의 교환들이 있었다. 이 회의에서 토의된 중요한 안건들 중에는 1. 영국제품 불수입결의, 2. 미국식민주민들의 인권보장 3. 과세는 자치적으로 부과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영국상품의 불매운동의 일환으로 영국이 미국국민들에게 부과한 Stamp Tax (인지세)를 없애기 위해 뉴욕에서 1763년 10월에 13개주 중 9개주 의회에서 보낸 대표들이 모여 ‘Special Stamp Act Congress’ 를 소집하고 Stamp Act 등의 악법들에 항의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결국 1776년 3월 18일에 Stamp Act는 철폐 되었다.

1775년 5월에 필라델피아에서 12주의 대표들이 다시 모여 The Second Continental Congress 가 이제는 자신들의 당당한 식민지 국민들의 권한을 주장하는 의회로써 아래와 같은 안건들을 결의하였다.
1. George Washington 장군을 Commander in chief of the Continental Army 로 임명하고 2. 모든 영국선박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해적 같은 해군’을 창설 했다. 이때부터 The Second Continental Congress는 외교, 무역, 통상, 화폐, 과세, 국채, 육군, 해군, 해병대 등을 통괄하는 실질적으로 임시정부, 중앙정부, 국회, 독립운동 본부 등의 역할을 ‘대통령’이라는 직분도 없이 7년여에 걸친 독립 전쟁동안 해왔었다.

고심 끝에 필자는 그때 당시의 역할에 따라 이 기관을 국회, 정부, 중앙정부 등으로 표현해 왔었다. 1775년 7월 16일에는 보스턴에서 Bunker Hill 결사전투가 있었고 1775년 6월에 The Continental Congress 가 대영국 선전포고를 하고 독립전쟁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영국왕의 직간접적인 임명을 받았던 주지사들은 영국배로 피신하였고 주의회들은 주지사의 지시를 거부하기 시작하였으며 자기들이 주민들의 대표임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이 영국의 정규군과 외국용병들을 미국에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미국의 일부 병력은 캐나다를 침공하다가 실패하였다.

또한 각 식민지 주들은 1776년 초부터 독자적으로 자치정부를 수립하기 시작하였는데 각주들은 자기들이 국가주권을 다 가지는 독립국가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고 한다. 모든 주들의 제일차 관심은 폭군정치(tyranny)의 방지에 있었었다고 한다. 또 정치지도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영국이 비성문헌법 국가이었기 때문에 폭군정치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듯하다.

실제로 영국은 Magna Carta, the British Bill of Rights 등 성문법 이외에 영국 재래의 전통, 관습, 국가이념 등 성문화되지 않은 것들로 ‘비성문헌법’이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미국의 Founding Fathers 들은 미국의 헌법이 통치자나 피치자나 서로 읽고 해석하는 문자로 되어있는 ‘성문헌법’이어야만 한다고 확신하였다.

미국의 제헌과정에서는 헌법의 내용과 거의 같은 비중으로 헌법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제안하며 누가 최종적으로 헌법초안을 헌법으로 가결시켜야 하느냐는 절차상의 문제가 심도 깊게 다뤄졌다. 각주가 독립국가라고 가정하면 주지사가 “왕”과 같은 존재가 되는 까닭에 주지사의 권한을 최소화 하는데 주력을 기울였던 것 같다.

그래서 미국의 모든 주 헌법에는 거의 공통으로 처음에는 주의회가, 얼마 후부터는 주민의 직접투표로, 비교적 짧은 임기의 주지사를 선출하였고 주지사의 법률 veto 권한을 최소화 하였고 임기 중에 탄핵을 받아 퇴직을 당할 수도 있게 만들었다. 주의회 해산권 같은 것은 애초에 주지 않았으며 주의회의 회기단축 같은 권한은 주지사에게 전혀 주지 않았다.

펜실베니아 주는 처음에는 주지사라는 직책을 없애버렸고 주의회도 단원제로 했었다고 한다. 거의 모든 주헌법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들이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다. 1. 언론자유 2. 대정부청원권 3.무단주택수사금지 4.강제군복무금지 5.배심원 재판권(Jury) 등이다. 헌법제정에 관해서는 앞으로 조금 더 심도 있게 다뤄보고자 한다. 1776년 1월 15일에 Thomas Paine 의 ‘Common Sense’가 발간되어 미 국민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The Second Continental Congress는 1776년 4월 6일에 영국의 Navigation Acts를 폐지하고 미국을 영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의 무역에 개방하였다. 또 5월에는 미국의 각 식민지 주들에게 자치정부를 수립할 것을 권고하였고 7월2일에는 미국의 독립을 선포(announced) 하였으며 7월 4일에는 독립선언서를 가결(Declaration of Independence)하였다.

이 글을 쓰면서 제국주의 국으로써의 영국과 일본의 식민통치정책들을 비교해 보게 된다. 영국은 최소한 미국식민지에서는 미국 식민지인들의 반영투쟁이 더 격렬하고 장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조선에서 왜정식민시대에 했던 것처럼 ‘고등계형사’들을 총동원하지 않았고 무저항적 평화적 항의시위를 한 비무장 민중들을 총포로 학살하지도 않았다.

보스턴 대학살이 있었으나 공정한 재판을 했으며 다른 충돌들은 양쪽이 다 무장한 군대들 간의 전투이었다. 삼일운동 때의 살상과 독립선언문 서명자들의 투옥, 지금까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후안무치, 2차 대전 중의 강제 성노예들에게 국가적으로 사과하고 보상을 하기는커녕 도리어 그 희생자들이 ‘창녀’였다고 69년이나 버티어 오고 있는 일본에 비하면 영국은 ‘양반’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앞으로도 대일관계에서 일본인들이 독종임을 항상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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