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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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Brake가 고장난채 종착역 향해 전속력 폭주하는 기관차

2014-06-0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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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환>

미국의 “원죄 2호”는 흑인노예착취라고 할수 있는데 아마 “원죄1호”는 미국원주민학대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Pilgrims를 아사의 위기에서 구해주고 초기 정착을 도와준 Squanto 라는 원주민이 유렵에서 몇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보니 전주민이 다 죽고 없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아마 백인들이 가지고온 전염병으로 몰살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유럽의 병균들에 전혀 접촉이 없어서 면역성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던 미국원주민들은 백인들로부터 사들인 식기구등을 쓰면서 병이 나기 시작해서 백인과의 접촉을 피했었다고 한다.

1654년에 불란서와 손을 잡고 초기 정착자들을 공격해오는 미국 원주민들에게 홍역으로 오염시킨 담요를 주어서 모두들 죽게 만들었다는 주장을 하는 역사가들도 있다. 말하자면 “세균작전”을 했다는 것인데 확실한 물증은 없지만 문서상으로 이런 문제가 언급된 것은 있다고 한다. 세계의 여러 나라들에 비해서 미국은 착한 나라이지만 인종문제에 대해서는 궁색한 논리를 써서 양심의 가책이 없어 보이는 일들을 해왔었다. 앞으로도 가끔 언급되겠지만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는 미국 건국이전부터 시작된 깊은 뿌리가 있는 “미국의 멍에”로서 미국은 아직까지도 이 멍에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다.


Brake가 고장 난 것도 모르는 기관차가 전속력으로 종착역까지 폭주하고 나면 큰 사고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영국은 사정을 모르는 채, 아니면 상관하지 않고, 미국 압박의 나사를 조여 왔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 개척을 시작한지 백여 년 만에 비교적 안정된 생활기반을 쌓아가며 ‘충실한 영국국민’으로 살려고 했던 미국사람들은 영국의 식민정책이 ‘착취’로 바뀌어 간다고 깨닫기 시작하면서 자구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영국은 여러 개의 Navigation Acts를 만들어서 미국의 산업을 통제하고자 하였으나 백여 년간 계속된 영불전쟁이 끝난 1763년 까지는 그 법률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하였다. 까닭에 미국은 영국 관리들을 매수해가며 비교적 자유롭게 품목이나 무역상대의 제약 없이 전 세계를 상대로 무역을 해왔었다.

Navigation Acts는 미국에서 생산해야 되는 품목들을 영국의 편의에 따라 제한하고 모든 수출은 영국을 통해서 하도록 하고 모든 수입도 영국을 통해서만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영연방식민지들을 제외하고는 그동안 활발했던 불란서, 화란등과의 무역도 금지시켰다. 처음에는 영국의 배로만 무역을 하도록 하다가 나중에는 영국이나 그 식민지에서 조선한 배들만 써야한다고 했다. 미국의 개인선박들에게 privateering 허가 (해적면허)를 주어서 적국들의 선박을 해상 습격하여 물자를 압수하게 하였으나 나중에는 국적에 상관없이 해적질들을 하게 되었고 해적질한 물품의 삼분지일을 수수료로 받은 영국 관리들은 해적질을 보호하고 장려하였다. 뉴욕은 해적물자 처분지로 아주 번성하였었다고 한다.

미국이 정식 무역으로 조달할 수 없는 물자들을 해적질을 해서 썼음으로 해적질과 밀무역은 애국적인 행동으로도 생각하였다고 한다. 미국의 최상 양반이라고 쳐주는 Cabot, Hancock, Livingston 같은 집안들이 다 밀무역으로 치부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혹시 법적으로 문제가 되어 재판을 받게 되면 미국식민지 사람들이 배심원이었던 까닭에 항상 “무죄” 평결을 받았다고 한다.
New England에서 주로 수출용으로 생산되던 rum의 원료인 설탕은 West Indies 에서 수입해 올 때 관세를 붙였으며 rum 의 다른 원료인 흑설탕 즙에도 관세를 붙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Navigation Acts를 만들었으나 관리들의 부패로 법집행이 재대로 되지 않았을 때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던 것들이 영국이 뒤늦게 관리들의 부패를 알고 제도를 바꾸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관세관 (Customs Agent)를 새로이 임명하고 재판도 배심원제도가 없는 해운특별재판소 (Admiralty Court)를 신설하여 더욱 엄격히 통제하도록 한 것이다.

오랜 전쟁 끝에 누적된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영국은 수상이나 재무장관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식민지 착취방법을 입법화했고 미국사람들도 새로 부과되는 세금을 피하기 위해 밀수를 더욱 열심히 하고 영국상품 불매운동 등 더욱 적극적인 저항운동들이 시작되었다.
“우리의 대표자들이 없는 채로 결정된 세금은 낼 수 없다” 는 구호를 부르기 시작하는 미국사람들에게 또 새로운 세금이 부과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어느 종류의 거래나 물품에는 인지세(stamp tax)’를 부과해 왔었는데 이 인지세를 1765년 11월부터 미국의 거의 모든 거래와 물품판매에 부과하였다. 모든 계약서, 공문서, 물건거래 등은 물론이고 playing card와 신문에 까지 인지세를 붙이도록 하였다. 수입 수출 품목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것 까지는 불평하면서 내거나 밀수로 피해오기도 했었지만 인지세가 붙어있지 않은 물품은 압수되고 소유자에게 벌금까지 부과하기 시작하자 미국인들은 인지세를 폭정의 상징으로 생각하고 저항하기 시작했다. 영국 관리들을 폭행하는 일들도 생기고 영국 상품의 불매운동으로 대미 무역수출이 급격히 줄어들자 영국 내에서도 인지세의 타당성에 대한 비판이 나기 시작했다.

영국은 인지세를 1776년 3월에 폐지하면서 또 다른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필수적으로 영국에서 수입해야만 되는 물품들에 대해서 관세를 부과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다시 불매운동은 완강한 저지운동이 시작되었다. 영국의 대미수출양이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결국 영국 무역상들의 반대로 이 관세들은 철폐되었으나 차 (tea)에만은 계속 관세를 붙이기로 결정되었다. 이런 정책에는 숨은 이유가 있었다.

인도식민지에서 차를 생산할 뿐만 아니라 인도식민지를 통치하고 있던 East India Company 가 차를 많이 생산했는데 영국에 내야 되는 관세를 내지 못해 엄청난 양의 차를 영국의 창고에 쌓아두고 있었다. 미국은 공공연하게 차를 밀수해 마시고 있었다. 영국은 이 차를 미국에 보내서 관세를 물리고 팔면 관세도 걷고 차도 다 팔아치우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다. 관세를 내고 차를 들여오더라도 밀수입하는 차보다 값이 더 싼 것도 영국이 이런 “묘안‘을 짜 내도록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더 비싼 밀수입차를 사 마실지언정 영국에 관세를 내가며 차를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1773년 12월 16일에 극열분자 Samuel Adams 가 주동이 된 Sons of Liberty 단원들 약 130명들이 Mohawk Indian 으로 분장하고 부두에 차를 실고 정박해 있는 선박에 올라가 차 342 상자 (45 톤) 를 Boston 항구에 전부다 던져버렸다. 이것이 그 유명한 Boston Tea Party 사건이었다. 이것은 분명히 “애국적인 극열분자”들의 쾌거로써 미국 사람들에게 자각심을 불어넣고 영국에는 엄중한 경고를 주는 조치이었다.

‘Tea Party’라는 표현을 보면서 “어디서 들어본 말인데?” 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옳은 말이다. 지난 4-5년 전부터 미국 공화당 극보수 분자들이 자신들을 ‘Tea Party member’라고 불러가면서 말장난들을 해오고 있는 탓이다.

’Party’라는 단어는 ‘정당’이란 의미도 있지만 우리가 흔히 ‘잔치’란 의미로 쓰는 단어이기도 하다. 미국인들이 Boston의 이 사건을 ‘Boston Tea Party’나 ‘Tea Party’라고 부르는 것을 이용해서 공화당의 일부 극보수분자들은 자신들의 주장과 행동이, 독재정권 민주당에 항거하는 것으로써 Boston Tea Party 때의 미국 사람들의 애국행동과 같다고 억지 말장난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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